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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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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지진
다이와 게이초 위령비의 모습. 게이초 쓰나미(가운데)와 호에이 쓰나미(오른쪽)의 교훈이 새겨져 있다. 일본 도쿠시마현 가이요정 소재.
게이초 지진은(는) 일본 안에 위치해 있다
게이초 지진
본진
현지일1605년 2월 3일(게이초 9년 음력 12월 16일)
진앙일본 도카이도 해역으로 추정
A: 북위 33° 30′ 동경 138° 30′ / 북위 33.5° 동경 138.5°  / 33.5; 138.5[1][a]
B: 북위 33° 00′ 동경 134° 54′ / 북위 33.0° 동경 134.9°  / 33.0; 134.9[1][a]
피해
피해 지역일본 태평양 연안 거의 전 지역
사상자5천명~1만명 사망

게이초 지진(일본어: 慶長地震 게이초지신[*])은 에도 시대 초기인 게이초 9년 음력 12월 16일(1605년 2월 3일)에 발생했다고 추정되는 지진지진해일이다. 이노보사키곶에서부터 규슈까지 일본 태평양 연안에서 거대 쓰나미가 덮쳐 피해를 입었으며 쓰나미로 발생한 익사자는 약 5천명, 최대 1만명설까지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지진동과 흔들림 기록이 쓰나미 기록에 비해 극히 적고 진원이나 발생 매커니즘, 피해 규모도 불분명한 점이 많아 미스터리인 쓰나미이다.

쓰나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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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는 현지 시각 기준 저녁에서부터 밤까지 이노보사키곶에서부터 규슈에 이르는 일본 태평양 연안 전 지역에서 밀려들어왔다. 쓰나미가 타격을 입힌 범위는 1707년 호에이 지진과 비슷하지만 이후 발생한 겐로쿠 지진의 쓰나미와 호에이 지진 쓰나미로 많은 사료가 유실되었다고 추정되며 기슈 도쿠가와가도사 야마우치씨 등이 이봉되기 전후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현존하는 역사 기록이 많지 않다.[3][4]

  • 보소반도 동해안 - 구체적인 높이는 알 수 없지만 보소반도에 쓰나미가 도달한 건 확실해 보이며, 특히 현재의 가쓰우라시, 가모가와시 등에서 큰 쓰나미가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 높이는 겐로쿠 지진 당시의 쓰나미 높이보다는 낮다고 추정된다.[3] 보소반도의 쓰나미를 기록한 《보소치란기》에서는 게이초 6년 12월 16일(1602년 2월 7일)에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즈사국, 시모사국에서는 30 단위로 조수가 빠지고 갯벌로 변했다가 태산과 같은 쓰나미가 밀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즈반도 - 니시이즈정 니시나에서 쓰나미가 내륙으로 1.3~1.4 km 정도 밀어닥쳤고 시모다시 도지에서는 쓰나미 때문에 절당과 존상이 산 속으로 떠밀려가는 등 추정 높이 4 m 정도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 하치조섬 - 다니사토의 가옥이 전부 유실되어 익사자 57명이 발생했다(《이즈국하치조섬송복사고기》(伊豆国八丈島宋福寺古記) 기록)
  • 하마나호 하시모토슈쿠(시즈오카현 고사이시 아라이정 하마나) - 《당대기》(当代記), 《도쇼쿠실기》(東照宮実記)에 하시모토에서 100가구 중 80가구 정도가 떠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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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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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주
  1. 진도 분포에 따른 추정 진앙 좌표로 단층 파괴 시작점인 본래의 진앙 및 투영한 진원이 아니다. 지진학적인 진원은 지진계가 없으면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며 진원역이 광대한 거대지진에서는 이게 무의미할 뿐 아니라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도 있다.[2] 또한 이 진앙은 이이다(1981년) 등이 피해 분포가 크게 2곳으로 나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우사미(2003년) 등이 추정한 진앙이다. 하지만 본진이 이즈·오가사와라 해구 연안 등 원거리에서 닥친 지진해일이라면 진앙 위치가 크게 달라진다.
출처주
  1. 日本地震学会日本付近の主な被害地震
  2. 石橋(2014), pp.7-8.
  3. 伊藤純一,都司嘉宣, 行谷佑一(2005):慶長九年十二月十六日(1605.2.3)の津波の房総における被害の検証 (PDF) , 『歴史地震』 第20号 p.133-144.
  4. 今村明恒(1943)、「慶長九年の東海南海兩道の地震津浪に就いて」『地震 第1輯』 1943年 15巻 6号 p.150-155, doi 10.14834/zisin1929.15.150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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