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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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알바니아 폭동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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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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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에 체류 중인 자국민들을 대피시키는 미군
교전국

알바니아 반군

알바니아 살리 베리샤 정부


유엔 알바 작전

독일의 기 독일 (리벨레 작전)
미국의 기 미국 (실버웨이크 작전)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기 북대서양 조약 기구
지휘관

알바니아 스켄데르 지누시
알바니아 그라모츠 루시
알바니아 알베르트 쉬티
알바니아 자니 초시


알바니아 레카 1세


알바니아 아르벤 이마미
알바니아 리드반 페쉬케피아


알바니아 네리탄 체카

알바니아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바쉬킴 가지데데
알바니아 사페트 줄라리


독일 헤닝 글라바츠

그리스 디미트리오스 치마니스
병력
불명

이탈리아 7,000명
프랑스 850명
그리스 803명
독일 100명 이하
터키 500명
루마니아 400명

오스트리아 100명

알바니아 반란, 알바니아 시위로 알려진 알바니아 내전은 1997년 알바니아에서 발생한 민간 무질서 상태로 폰지 사기이 주요 원인이었다. 정부가 마비되고,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다.[1][2] 이 사건은 반란, 내전 또는 내전으로 확대된 반란 중 하나로 규정되고 있다.

1997년 1월 알바니아 시민들은 총합 1.2억 달러를 잃었고, 이들 중 30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2월부터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일일 시위를 개시하며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했고, 그들은 정부가 계획안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다고 믿었다. 3월 1일 총리 알렉산데르 멕시가 사임했고, 3월 2일에는 대통령 살리 베리샤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3월 11일, 알바니아 사회당이 지도자였던 바쉬킴 피노가 총리로 지명되면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전환 이후에도 시위는 그치지 않았고, 시위가 북부 알바니아로 확산되게 되었다. 정부는 북부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성공했지만, 정부의 능력과 군 유지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알바니아 남부의 절반은 반군과 범죄 갱단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3]

대부분의 인구가 모인 지역은 3월 13일에 데모에 휩싸이게 되었고 외국은 알바니아 내 거주 중인 자국민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철수에는 리벨레 작전실버웨이크 작전, 그리고 코스마스 작전이 포함된다.[4]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유엔 결의안 1101호를 통해 3월 28일 7,000명의 병력 파견을 승인했고, 알바니아 내 질서 회복과 구호 활동을 지시했다. 유엔은 시위가 알바니아 국경을 넘어 확산되고 유럽 전체로 피난민이 이동할 것을 우려했다. 4월 15일 이탈리아가 주도한 알바 작전이 개시되었다.[3] 반란 이후 약탈된 무기들은 코소보 해방군에게 넘어갔고,[5] 대부분의 무기는 코소보 전쟁 때 사용되었다.[6]

개요[편집]

1990년대 들어서 냉전이 종식됨과 동시에 알바니아는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오랜 사회주의 체제로 인한 낙후된 경제 상황 탓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피라미드 회사들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파고들었다. 그들은 인플레이션으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국민들에게 고수익 보장을 약속했다. 그들의 유혹에 약 200만 여명의 알바니아 국민들은 이들에게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그 수는 당시 알바니아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달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바니아 정부와의 유착 관계를 통해서 가능했었다. 이들 피라미드 회사는 1997년부터 연쇄적으로 파산하기 시작하면서 파국이 시작되었다.[7]

폭동의 발생[편집]

피라미드 회사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자, 그들에게 투자한 국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그해 1월 16일부터 남부 지방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으며, 규모는 커져 수도 티라나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다가 2월 20일블로러에서 대학생들이 투쟁을 벌였으며, 일주일 후인 2월 27일에 시위대가 블로러에 있는 대학교 내에서 습격 사태를 벌여 6명의 공무원과 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여 유혈 사태로 번졌고, 마침내 3월 1일에 시위대들은 근처에 주둔해 있던 해군 기지를 점령하면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폭동은 점점 내전으로 확산되었고, 평화 유지를 위해 3월 28일이탈리아, 미국, 독일, 그리스를 비롯한 다국적 군대가 투입되었다.

결과[편집]

알바니아의 대통령인 살리 베리샤는 마침내 조기 총선을 약속하였고, 그 해 6월 29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여당인 알바니아 민주당이 패하고 야당인 알바니아 사회당이 승리하였다.[8] 살리 베리샤는 7월 24일에 퇴진하였다.

8월 11일에 외국 군대가 철수하여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 결과 3,800여명의 민간인, 군인, 경찰이 희생되었다.

각주[편집]

  1. Christopher Jarvis, The Rise and Fall of Albania's Pyramid Schemes, Finance & Development: A Quarterly Magazine of the IMF, March 2000.
  2. Crisis in Albania. Public Broadcasting Service
  3. Pike, John. “Albanian Civil War (1997)”. Globalsecurity.org. 2010년 6월 14일에 확인함. 
  4.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Operation_Cosmas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5. “Kosovo: Background to crisis (March 1999)”. 2008년 5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17일에 확인함. Following the February/March 1997 looting of Albanian Army barracks and depots, weapons became even more readily available. The current price for a Kalashnikov is barely US$300, and the most conservative estimates of Albanians' stocks now start at 25,000 hidden AK assault rifles. Also available are anti-tank weapons, rifle and hand grenades and even small-calibre mortars and anti-aircraft guns. 
  6. http://www.historytoday.com/robert-bideleux/kosovos-conflict.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7. 떨고 있는 사람들
  8. 알바니아 총선 야 압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