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스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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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스펙터
Phil Spector
Phil Spector mugshot.jpg
필 스펙터의 머그샷
기본 정보
본명 필립 하비 스펙터
(Philip Harvey Spector)
출생 1939년 12월 26일(1939-12-26) (77세)
미국 미국 뉴욕 주 브롱크스
국적 미국 미국
직업 음반 프로듀서, 작곡가, 세션 연주자
장르 , , 걸 그룹 사운드, 리듬 앤 블루스
악기 기타, 피아노, 보컬
활동 시기 1958년~1981년, 2002년~2009년
레이블 필스, A&M, 애플, Warner Spector, Phil Spector International, ABKCO , 소니 레거시
관련 활동 비틀즈, 달린 러브, 조지 해리슨, 해리 닐슨, 존 레논, 레너드 코언, 라몬즈, 더 로네츠, 라이처스 브라더스, 스타세일러
웹사이트 www.philspector.com

필립 하비 "필" 스펙터(Phillip Harvey "Phil" Spector, 1939년 12월 26일 ~ )는 1960년대197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미국음반 프로듀서, 음악가, 그리고 작곡가이다. 그는 비틀즈라몬즈를 포함한 많은 그룹들과 작업 했으며, 마이클 잭슨을 탄생시킨 퀸시 존스와 함께 팝의 위대한 프로듀서로 꼽힌다. 또한 월 오브 사운드라는 사운드 시스템을 만들어 대중음악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단순한 엔지니어나 프로듀서가 아니라 곡을 쓰고, 보컬 지도를 하고, 연주자들을 조율하고, 녹음 시스템을 만들었던 창조적인 아티스트였고, 이런 영역을 개척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1]

브루스 스프링스틴, 롤링 스톤스, ABBA, 브라이언 윌슨 등 전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필 스펙터의 사운드에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고 수많은 후배 프로듀서들도 필 스펙터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1][2] 음반 제작 분야에서 일궈낸 공로로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3]

생애[편집]

필 스펙터는 1939년 12월 2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1949년 부친이 사망하고 그의 가족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페어팩스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학교는 허브 앨버트, 진 앤 딘, 제리 리버 등 무수한 음악인을 배출한 곳이었다. 필 스펙터도 이곳에 재학 중인 무렵 밴드 활동을 시작하여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음향기기와 녹음 기술에 관해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무렵 고교 동창들과 테디 베어스를 결성해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4]

테디베어즈는 1958년 스펙터의 곡 〈To Know Him is To Love Him〉으로 빌보드 싱글 1위에 올랐다. 이에 큰 자신감을 얻은 밴드는 곧바로 데뷔 앨범 《the Teddy Bears Sing!》을 발표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첫 앨범 제작 현장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뮤지션이 아닌 프로듀서로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4]

1959–69[편집]

그룹 해체 후 스펙터는 프로듀싱으로 전향했다.[2] 필 스펙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프로듀서 레스터 씰의 조수로서 음향과 레코딩 기술의 노하우를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드높은 이상에 비해 당시 로스앤젤레스 음악 산업의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은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고교 선배인 제리 리버와 그의 파트너인 마이크 스톨러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줄 것을 간청한다. 그들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배우며 프로듀서로서의 재능을 넓혀가고 있던 찰나, 필은 리버&스톨러와 그들이 작업을 전담하고 있던 거대 레이블 애틀랜틱 레코드 사이에 생긴 금전적인 갈등에 휘말렸다. 어느덧 시대의 총아가 된 그들은 이전까지 음악 업계에 전례가 없던 프로듀스 비용을 애틀랜틱 레코드에 청구한다. 그것이 인정되자, 그들은 과거 작업했던 작품들에 대한 비용까지 요구하며 나선 것이다. 그들의 이악스러움에 일은 점점 더 꼬여가고 있었다. 애틀랜틱의 경영자인 하메드 아티건과 제리 웩슬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그들은 리버&스톨러의 요구에 응하여 모든 비용을 지불하지만 곧바로 해고를 통보, 후임으로 그들의 제자였던 필을 채용하기에 이른다.

아직 견습생에 불과했던 그가 곧바로 진가를 드러내긴 힘들었다. 당시 애틀랜틱 레코드는 벤 E. 킹과 드리프터스 등의 잘나가는 스타들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회사를 지탱해 온 간판스타 레이 찰스과 백인 아이돌 스타 바비 다린이 잇달아 경쟁사로 이적했고 거액을 들여 교섭 중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마저 RCA레코드에 양보해야 했다. 결국 남은 이들은 래번 베이커나 루스 브라운과 같은 전형적인 R&B 계열의 흑인 가수뿐이었다. 필은 그들의 프로듀스를 맡으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애석하게도 음반사의 매출 신장에는 조금의 성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이 시기 그가 제작한 히트곡이란 벤 E. 킹의 〈Spanish Harlem〉이 전부였다. 실의에 빠진 필은 애틀랜틱에 사표를 내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게 된다.[4]

1961년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온 후, 절치부심한 필 스펙터는 옛 스승 레스터 씰과 함께 필레스 레코드를 설립, 드디어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사운드 메이킹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는 흑인 걸 그룹인 크리스털스로서, 그후 다렌 러브와 그에 대한 평가를 부동의 것으로 만든 더 로네츠 , 백인 소울 듀오 레이처스 브라더스가 차례차례 대박 행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사운드 녹음의 혁신을 이룬 월 오브 사운드 방식으로 각광 받았다. 이것은 수많은 오버 더빙으로 믹스를 꽉 채워, 마치 소리의 벽을 쌓는 것 처럼 풍성한 사운드를 창조해내는 기술이었다.[2] 그의 솜씨가 빚어낸 더 로네츠의 〈Be my baby〉(1963년),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You've lost that lovin' feeling〉(1964년)과 〈Unchained melody〉(1965년)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5]

그가 창조한 사운드 메이킹은 수많은 추종자와 아류를 낳으며, 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명실상부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대중 음악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흐름은 밴드 사운드를 골자로 하는 록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오직 스튜디오에서의 고된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한 완벽한 사운드보다 단순하고 원시적인 에너지를 중시하는 흐름이었고, 그 덕분에 필의 존재는 점차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4]

1969–현재[편집]

1960년대에 잠시 은퇴했지만 1970년 비틀스의 《Let It Be》로 돌아온 그는 레너드 코언비치 보이스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뮤지션들의 프로듀서가 되었다.[1] 1970년 발매된 비틀즈의 앨범 《Let It Be》에서 그는 〈Let It Be〉, 〈The Long and Winding Road〉등의 곡에 오케스트라를 더빙했었다. 폴 매카트니는 이 앨범을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도로, 초기 스타일의 간소하면서도 "라이브 공연과 같은" 분위기의 앨범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필 스펙터는 곡들을 아주 화려하게 꾸며 놓아았기 때문에 폴 매카트니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결국 폴 매카트니는 2003년 필 스펙터의 더빙들을 모두 제거하고, 일부 곡들을 수정한 《Let It Be… Naked》를 내놓았다.[6]

70년대에 접어들어 존 레논, 조지 해리슨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장의 앨범과 싱글 작업에 참여했다. 해리슨의 1972년 솔로 앨범 《The Concert For Bangladesh》에 참여하여 그래미 앨범상을 수상했다.[2] 1980년에 들어 뉴욕의 펑크록 밴드 라몬즈의 레코딩에 참여하며 오랜만에 관심을 모았으며 1989년에는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4] 1990년대에 잠시 휴지기를 가졌고, 2003년 영국의 인디 록 그룹 스타세일러의 음반을 제작하며 복귀했다.

살인 혐의[편집]

필 스펙터의 머그샷 (2009년)

2003년 2월 3일 오전, 필 스펙터는 캘리포니아의 웨스트 할리우드에 있는 레스토랑, 하우스 오브 블루스에 들렀다. 그는 큰 키에 모델 스타일의 중년 여성 라나 클락슨을 만났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함께 나와 대기 중이던 리무진에 동승하여 캘리포니아의 알람브라 지역에 있는 대저택 피레네 캐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갔고, 운전기사인 아드리아노 드 수자는 밖에서 대기했다. 한 시간 후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곧 이어 스펙터는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집에서 나오며 혼잣말처럼 "내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라며 중얼거렸다. 스펙터는 저택 뒷문으로 나갔고, 드 수자는 황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클락슨은 의자에 앉은 채 고꾸라진 모습이었다. 그는 911에 전화를 걸었고, 의료진과 경찰이 도착했다. 필 스펙터는 2003년 11월 20일에 클락슨의 살인범으로 기소되었다.[1]

라나 클락슨의 사인은 총상으로, 그는 입에 총을 쏘았다. 스펙터는 클락슨이 총에 키스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스스로에게 총을 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4년 뒤인 2007년 3월에 시작되었고, 그 기간 동안 스펙터는 100만 달러(약 13억원)를 내고 석방된 상태였다.[7] 배심원들의 의견이 엇갈려 평결을 내놓지 못한 불일치 배심이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과학수사관 헨리 리는 유죄 입증의 결정적 증거를 숨겼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스펙터는 재판 기간 동안 변호사를 두 번 바꿨다.

2차 공판은 2008년 10월에 시작됐고 2009년 4월에 2급 살인 유죄 판결과 함께 19년형이 내려졌다.[7] 그는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 복역을 시작했다.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