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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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일 (수) 23:52 판

전조(前趙 304년~32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유연이 건국한 나라이다. 처음엔 국호가 한(漢)이었으나 후에 조나라로 변경하였다. 같은시대 석륵이 똑같은 이름의 조나라을 세웠기에 유연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구별지어 부르게 되었다.

역사

후한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선비족 등 주변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 사람들이 대거 낙양 근처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중국의 내부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팔왕의 난서진 황족들의 권력쟁탈과 그에 따른 통치능력 상실을 보고 독립하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한에 굴복했던 남흉노 선우의 후예인 유연은 진나라로부터 흉노 5부 대도독에 임명되었으나, 8왕의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이라고 명명했다.(유연의 아버지인 유표는 후한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유씨 성을 하사받은 데에서 비롯됨.) 유연은 아들 유총과 친족인 유요, 갈족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并州) 일대를 공략했다.

유연은 고조(高祖) 유방의 후손 국가인 후한촉한의 후계자를 자부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쪽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 소열제 유비의 자손은 성한으로 도망친 유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여 절멸하였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폭군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인 초왕 유총(3남)이 모반을 일으켰다. 신황제 유화는 어머니측의 숙부 호연유와 함께 유총과 내통하던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다음해 진나라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을 사로잡았다.(영가의 난) 진나라는 장안에서 민제을 옹립하여 전조에 저항했으나 유총은 장안마저 함락시키고 민제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했고 이때부터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요와 석륵이 협력하여 이를 제압하고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가 되어 국호을 (趙)로 고쳤다. 이것이 바로 전조이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봉해졌으나 이윽고 자립하여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했다.(후조) 유요의 조나라는 서쪽에서 석륵의 조나라는 동쪽에서 각자 화북을 양분하여 다툼을 벌였으나 유요는 이후 추락하여 328년 석륵에게 멸망당했다. 아들 유희가 뒤를 계승했으나 329년 석호에 의해 살해당하여 이로써 전조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역대황제일람

전조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한왕
(漢王)
유연(劉淵) 원희(元熙) 304년 ~ 308년 304년 ~ 308년
1대 고조
(高祖)
태조(太祖)
(유요가 추증)
광문황제
(光文皇帝)
유연(劉淵) 영봉(永鳳) 308년 ~ 309년
하서(河瑞) 309년 ~ 310년
308년 ~ 310년
2대 - 폐제
(廢帝)
{여왕(厲王)}
유화(劉和) - 310년
3대 열종
(烈宗)
소무황제
(昭武皇帝)
유총(劉聡) 광흥(光興) 310년 ~ 311년
가평(嘉平) 311년 ~ 315년
건원(建元) 315년 ~ 316년
인가(麟嘉) 316년 ~ 318년
310년 ~ 318년
4대 - 은황제
(隱皇帝)
유찬(劉粲) 한창(漢昌) 318년 318년
5대 - - 유요(劉曜) 광초(光初) 318년 ~ 329년 318년 ~ 328년
6대 - - 유희(劉煕) " 328년 ~ 329년
  • 유요가 318년에 국호을 (漢)에서 (趙)로 변경하였다.

틀:중국 오호십육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