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장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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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편집]

“법은 법이라. 뭐라 자신은 판단하기 어려우나 죽산은 공산주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법무장관을 만나 죽산의 형집행을 3·15 선거 후로 미루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는데…집행되었다. 법무장관의 배신이었고 식언이었다. 이 배신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서 받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서라도 받게 될 것이다.”

장택상은 조봉암의 인물됨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으며 광복 후 경찰청장으로 좌익 검거에 앞장섰으나 자신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죽산의 사형이 집행되자 분개한 회고담

100범 (토론) 2008년 7월 9일 (수) 01:28 (KST)[답변]

어록[편집]

  • "여러분이 믿는 것은 경찰관의 무기요, 우리가 믿는 것은 3천만의 목소리와 그 지지인 것입니다. 어느 편이 승리하는가? 우리가 날짜를 두고 헤아리고 손을 꼽아 생각해 봅시다. 반드시 이길 날이 있을 것을 압니다.

                         - 1956년 8월 4일 국회 발언[1]"
  • "소위 국정을 요리하는 의사당으 마치 싸움터와 같은 살기를 조성하여 국정은 나날이 글러먹어 가고 있고, 이에 따라 인심은 더욱 악화되어 국세는 누란의 급을 고하고 있다. 국회의사당은 일당, 일파의 싸움터가 아니라 3천만의 살기 좋은 것을 위한 싸움터가 아니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국민은 빈곤과 전화(戰禍)와 부패에 신음하고 있는데, 이 참상을 도외시하고 자화자찬격으로 저만 잘났다 하는 편파 싸움에 영웅을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이상 더 같이 국정을 논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우리들은 공산군과 일의대수의 지점에 거주하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망각하고는 모든 국정을 논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엄격히 판단하고 있다..

                                - 1958년 12월 3일 조선일보 칼럼[2]"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11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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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병혜 편, 《상록의 자유혼: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24페이지
  2. 장병혜 편, 《상록의 자유혼: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4~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