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브레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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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브레 동맹 전쟁
이탈리아 전쟁의 일부
Northern Italy in 1494.png
1494년 북 이탈리아; 1508년 루이 12세가 밀라노 공국에서 스포르차 가를 축출하고 병합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교전국

1508–10:
캉브레 동맹: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기 신성 로마 제국
Arms of Ferdinand II of Aragon (1513-1516).svg 스페인 제국

페라라 공국의 기 페라라 공국
1508–10: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 베네치아 공화국

1510–13: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Coat of arms of the House of Este (1471).svg 페라라 공국

1510–11: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 베네치아 공화국


1511–13:
신성 동맹: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 베네치아 공화국
Arms of Ferdinand II of Aragon (1513-1516).svg 스페인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기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잉글랜드 왕국

Early Swiss cross.svg 구스위스 연방

1513–16: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 베네치아 공화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왕국

Coat of arms of the House of Este (1471).svg 페라라 공국

1513–16: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Arms of Ferdinand II of Aragon (1513-1516).svg 스페인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기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잉글랜드 왕국
밀라노 공국 밀라노 공국

Early Swiss cross.svg 구스위스 연방

캉브레 동맹 전쟁(Guerre de la Ligue de Cambrai, Guerra della Lega di Cambrai)은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주요 전쟁 중 하나이며, 신성 동맹 전쟁과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1508년부터 1516년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의 주요 참전국으로는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프랑스이며,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피렌체 공화국, 페라라 공국, 밀라노 공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스위스 용병를 포함한 인접 서유럽의 강국들도 자주 참전했다.

이탈리바 북부에서 베네치아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던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로 구성된 반-베네치아 동맹 세력인 캉브레 동맹을 조직한다. 동맹이 초기에 성공을 거뒀으나, 율리오 2세와 루이 12세 사이의 분쟁은 1510년 동맹 해체를 야기했고, 율리오 2세는 프랑스에 맞서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는다.

베네치아-교황령 동맹은 마침내 신성 동맹으로 확장되었고 1512년에는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냈지만, 전리품 분배에 대한 불화로 베네치아가 동맹을 깨고 프랑스와의 친선을 하게 만들었다. 루이 12세의 뒤를 이어받은 프랑수아 1세의 지도하에서 프랑스군과 베네치아군은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그들이 상실했던 영토를 회복해냈고 1508년 시기 이탈리아 지도의 상황으로 돌려놓기로 합의한 누아용브뤼셀 강화 조약을 통해 다음 해에 전쟁이 종결되었다.

서막[편집]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의 여파 속에 프랑스의 도움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마냐를 점거하면서 중부 이탈리아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권을 굳혔다.[1] 교황군의 곤팔로니에르로 활동하던 체사레 보르자영지로서 지배하던 볼로냐벤티볼리오 가를 축출시켰고, 1503년 8월 18일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면서 이 지역을 영구적인 보르자 영지로 만들기 위한 진척이 되었다.[2] 체사레가 그가 사용하기 위해 교황령의 금고의 나머지 부분을 점거하고 있었음도, 그는 콘클라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대가 몰려드며 로마를 사수해내지 못 했다. 선출된 교황 비오 3세(얼마 못 가 사망하고 교황 율리오 2세로 대체됨)는 체사레가 가진 그의 직위를 없앴고 일개 부대 지휘관으로 강등시켰다.[3] 체사레가 약화된 것을 감지한 재산을 박탈당했던 로마냐 지역의 영주들은 그들의 재산을 되찾는 도움을 주는 대가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복종할 것을 제안했고; 베네치아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1503년 말에 리미니, 파엔차 외 몇 개 도시들을 차지했다.[4]

체사레를 체포하여 감금하면서 교황군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던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게 점거한 도시들의 반환을 요구하며 로마냐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처음에는 로마, 그 후에는 마드리드로 거쳐를 옮겼다. 교황령의 주권이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항구 도시들에 인정됨을 알고 있었고 율리오 2세에게 연간 비용을 지불하고자 했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도시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 맞서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사망과 각 동맹 세력 간의 관계 붕괴는 동맹의 해체를 불러일으켰지만, 베네치아가 일부 도시들을 포기했다. [5] 얻은 이득에 불만족스러워 했음에도 율리오 2세는 공화국과 싸울 충분한 힘을 가지지 못 했기에, 그는 2년간 대신에 교황령과 베네치아 사이에 있던 준 독립 상태의 볼로냐와 페루자 재정복했다.[6]

1507년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소유에 있던 도시 반환 요청을 다시 시작했고, 베네치아 의회가 이를 다시 한번 퇴짜놓으면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공화국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황제 대관식을 치루기 위해 로마로 간다는 핑계를 삼아 막시밀리안 1세는 1508년 2월에 거대한 군대를 데리고 베네치아 영토에 진입했고 비첸차로 향했으나,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에 격퇴당한다. 2주 뒤 티롤군의 2차 공격은 심지어 완전히 실패했고; 달비아노는 황제군을 격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트리에스테피우메를 점령하며 막시밀리안에게 베네치아와 강화를 맺도록 했다.[7]

캉브레 동맹[편집]

황제의 침략 실패로 인해 굴욕을 느낀 율리오 2세는 루이 12세(제2차 이탈리아 전쟁 이후 얻은 밀라노 외에 이탈리아로의 확장에 관심을 두던)에게로 관심을 돌려 동맹을 제의했다. 3월 중순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석이던 비첸차 주교령에 그들의 후보자를 임명함으로서 그들이 공격받을 핑계를 제공하였다(이는 전통적으로 벌어진 것이였으나, 교황은 이를 개인적으로 도발로 여겼다); 교황은 베네치아를 제압하기 위해 그에 동참하도록 모든 기독교 국가들을 소집했다.[8] 1508년 12월 10일, 교황령, 프랑스, 아라곤, 신성 로마 제국의 대표단은 공화국에 맞서 캉브레 동맹을 맺는다. 협의 사항은 이탈리아내 베네치아 영토 축소 달성과 그에 대한 조인국들 간의 분할이였다: 막시밀리안은 추가적으로 이스트리아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프리울리를, 프랑스는 브레시아, 크레마, 베르가모, 크레모나를 밀라노 영토에 합병, 페르난도는 오트란토를, 리미니라벤나를 포함한 나머지 영역은 교황령에 주어지도록 합의했다.[9]

1509년 4월 15일, 루이는 밀라노를 떠나 프랑스군을 이끌고 재빠르게 베네치아로 향했다. 이에 맞서 베네치아는 오르시니 가 친척들 -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와 니콜로 디 피틸리아노 - 가 이끄는 콘도티에로 부대를 고용했으나 프랑스군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을 두고 합의를 못 하며 반격에 실패했다. 그 결과로 루이는 5월 초에 아다 강을 건넜고 달비아노는 그에게 맞서러 갔고, 경사진 곳에서 싸우는 것을 피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 믿던 피틸리아노는 남쪽으로 퇴각했다. 5월 14일, 달비아노는 아냐델로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격돌했고, 수가 부족하던 그는 그의 친척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전투를 멈추고 그에게 합류하는 답변을 보내었다.[10] 새로 전달된 명령을 무시한체 달비아노는 전투를 지속했고 그의 군대는 결국에는 포위되어 전멸하였다. 피틸리아노는 루이의 군대와 맞딱트리지 않으려 했지만, 달비아노의 패배 소식을 들은 후, 그의 용병대는 다음 날 아침에 많은 수가 탈영을 하면서, 잔여 베네치아군과 함께 트레비소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11]

베네치아군의 붕괴가 달성되었다. 루이는 가장 동쪽인 브레시아까지 특별한 저항 없이 베네치아의 영토를 차지했다. 베네치아는 이전 세기 동안 이탈리아 북부에서 쌓아온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12] 프랑스군에 점령되지 않은 주요 도시들 - 파도바, 베로나, 비첸차 -은 피틸리아노의 철수로 무방비 상태에 놓이며, 베네토에 도착한 막시밀리안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한편 율리오 2세는 공화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파문 명령을 공표하였고, 로마냐 지역을 침공하였고 캉브레 동맹에 참여하고 4월 19일에 곤팔로니에르로 임명된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의 도움으로 라벤나를 점령했고, 데스테 또한 폴레시네를 점령했다.[13]

그러나 새로 도착한 황제의 총독들은 빠르게 인기를 잃어갔다. 7월 중순에 파도바 시민들은 프로베디토레 안드레아 그리티가 이끄는 베네치아 기병대를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14] 파도바의 란츠크네히트 수비대는 효율적으로 저항하기에 숫자가 너무나 적었고, 파도바는 1509년 7월 17일 베네치아의 소유로 다시 돌아왔다.[15] 반란의 성공은 막시밀리안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하였다. 8월 초에 프랑스와 스페인군을 동반한 황제의 거대한 대군이 트렌트에서 베네토로 향했다. 말의 부족에다가, 지휘관들의 혼란으로, 막시밀리안의 군대는 9월까지 파도바에 도착하지 못 하며, 피틸리아노에게 도시에 군대를 집중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주었다. 파도바 공성전이 1509년 9월 15일에 시작되었고, 프랑스와 황제군의 공성 병기가 파도바 성벽을 성공적으로 파괴시켰으나, 수비군이 막시밀리안의 화를 키우며 9월 30일에 철수할때까지 방어해냈고 그의 주요 부대인 티롤군도 철수하였다.[16]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율리오 2세 (목제에 유화로 그림, 1511년 경 작).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의 세력 억제에 도움을 준 캉브레 동맹을 창설하며, 이탈리아내 교황의 권위를 지키려했다.

11월 중순에 피틸리아노는 공세로 바꾸어, 베네치아군은 잔여 황제군들을 쉽게 격퇴시키며, 비첸차, 에스테, 펠트레, 벨루노를 탈환했다. 이후 벌어진 베로나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피틸리아노는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가 이끄는 교황군을 전멸시켰다. 안젤로 트레비산이 이끄는 베네치아 갤리선 함대가 강을 따라 페라라를 공격한 폴레셀라 전투포 강에 닿을 내린 베네치아 함선들이 페라라 공성 무기에 침몰당하며 실패하고 말았다.[17]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은 이 결정적인 승리에 알폰소를 칭찬했다.[18] 새로운 프랑스군이 다시 한번 피틸리아노에게 파도바를 포기하게끔 하였다.

자금과 인력난에 직면한 베네치아 의회는 율리오 2세에게 대사를 보내 협상 논의를 위해 하도록 결정하였다. 교황이 주장한 조건들은 가혹하였는데; 공화국은 주권이 행사하던 지역에 성직자를 임명하는 전통적인 권한과 베네치아내 교황령 인사들에 대한 모든 사법권 포기, 전쟁을 촉발한 로마냐 도시들을 율리오 2세에게 반환할 것, 도시들을 재점령하는데 드는 비용을 배상할것등 이였다. 의회는 이 조건을 두고 두 달간 논의를 했으며, 결국에는 1510년 2월 24일 받아들였다. 베네치아 대사가 면죄를 위해 율리오 2세를 찾아가기도 전에, 10인 위원회는 몰래 진행하며 압박속에서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고 그러므로 공식적인 효력은 없었으며, 베네치아는 초기에 이 조건들을 위반했다.[19]

베네치아와 교황령 사이의 분명한 화해는 3월에 베네토로 진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막을 순 없었다. 1월에 피틸리아노의 사망으로 안드레아 그리티 지휘하의 베네치아군만 남게 되었으며; 막시말리안이 루이를 지원하지 못 했지만, 프랑스군은 그럼에도 5월에 베네치아를 비첸차에서 몰아냈다. 그리티는 황제-프랑스 연합군이 파도바를 공격할거라 예상하고 방어했지만 루이는 그의 조언가인 당부아즈 추기경의 사망에 더 많은 관심을 두며 파도바를 포위하려던 그의 계획을 포기했다.[20]

베네치아-교황령 동맹[편집]

한편 율리오 2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존재감이 커져가는걸 우려하게 됐고; 더욱 중요했던 것은 최근에 다시 획득한 폴레시네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에 맞서 교황령과 알폰소의 계속된 공격에서 소금 독점권을 두고 마찰을 가지던 알폰소 데스테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며, 율리오는 프랑스의 동맹인 페라라 공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곳의 영토를 교황령에 편입하려 했다.[21] 그가 가진 군대로는 이 공격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 했기에, 교황은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여 밀라노의 프랑스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또한 베네치아를 루이에 맞서 동맹에 참여하라 권유했다. 프랑스의 공격 재개에 놓인 공화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율리오 2세에게 파문당한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 그는 교황군에 수차례 패배를 가했다.

1510년 7월, 새로운 베네치아-교황령 동맹군은 공세적이였다. 프랑스가 점령한 초기 제노바 공격은 실패하였지만; 루체 말베초 지휘하의 베네치아군은 마침내 8월 초 비첸차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으며,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이끄는 교황군과 합류하여 8월 17일 모데나를 점령했다. 율리오 2세는 알폰소 데스테를 파문했고, 게다가 페라라 공국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며, 그의 다가오는 승리를 예감하며 페라라가 차지한 인근인 볼로냐를 방문하기도 했다.[22]

하지만 프랑스군은 스위스군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았고(그들이 롬바르디아에 도착했을때 루이에게 매수받으며 떠났다) 이탈리아의 심장부를 향해 남쪽으로 자유롭게 나아갔다. 10월 초 샤를 2세 당부아즈는 볼로냐로 진격하여 교황군을 분리시켜냈고; 10월 18일에는 볼로냐로부터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달았다. 율리오 2세는 현재 볼로냐인들이 교황령에 폭 넓게 적대적이고 프랑스군에 맞서 저항하라는 제의를 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일부 베네치아 기병대만을 둔 다음, 그는 당부아즈를 파문하며 독실한 잉글랜드 출신 대사가 교황을 공격하는 것을 피하고 페라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만에 의존하였다.[23]

점령된 미란돌라 성벽 위의 교황 율리오 2세》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라파엘로 탄크레디의 1890년 작품 (미란돌라 시청)

12월, 새롭게 소집된 교황군은 콘코르디아를 점령했고, 미란돌라를 포위하기도 했으며, 당부아즈가 미란돌라를 지원하러 왔으나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으며,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지게 됐다.[24] 교황이 직접 공격 지휘를 내리며 1511년 1월 미란돌라는 함락됐지만, 당부아즈를 대신한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콘코르디아와 카스텔프란코를 시켰고, 반면 교황군은 카살레키오로 퇴각했다. 그동안 알폰소 데스테는 포 강에서 베네치아군과 정면으로 맞딱드려 괴멸시켜내며, 다시 한번 볼로냐를 고립시켜냈다. 프랑스군의 함정에 빠질 것을 우려한 율리오 2세는 라벤나로 떠났다. 볼로냐의 수비에 맡겨진 추기경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는 율리오 2세보다 볼로냐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1511년 5월 23일에 프랑스군이 볼로냐 정문에 다다르자 그들은 빠르게 항복했다. 교황은 이 패배에 교황군 수비대가 보는 앞에서 알리도시의 살해를 진행한 우르비노 공작을 비난했다.[25]

신성 동맹[편집]

1511년에 로마냐의 대부분이 프랑스의 손에 떨어졌고, 체계적이지 못 하고 보수도 받지 못 하던 교황군은 라벤나로 진격해오는 트리불치오를 막을 상태가 아니였다.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 율리오 2세는 프랑스에 맞서 신성 동맹을 선언하였다. 이 새로운 동맹은 1511년 11월 17일 스페인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카탈리나 여왕나바라와 루이의 롬바르디아 점령의 희망을 가지고 캉브레 동맹을 포기했다), 웨스트민스터 조약 - 프랑스에 맞서 상호간의 도움을 줄 것을 약조 - 을 맺으며 프랑스 북부에 있는 그의 영토를 늘릴 때라고 결정한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합류 하며 빠르게 커져갔다.[26]

라벤나 전투 동안의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은 프랑스에게 긴 기간의 패배를 예고했다.

1512년 2월에 루이는 그의 조카 가스통 드 푸아에게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의 지휘를 맡겼다. 푸아는 앙부아즈가 했던 것 보다 더 힘든 일을 해냈는데; 볼로냐에서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의 진격을 확인한 후, 롬바르디아로 돌아가 프랑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베네치아군과 함께 지키고 있었던 브레시아를 약탈했다. 많은 수의 프랑스군들은 임박한 잉글랜드의 침공을 처리하기로 관심을 돌렸고, 푸아와 알폰소 데스테는 신성 동맹에게 결정적인 교전을 가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로마냐 지역의 마지막 교황령 요새인 라벤나를 포위했다.[27] 카르도나는 4월 초에 라벤나를 구원하기 위해 진격했고, 부활절에 벌어진 라벤나 전투에서 패배했고; 전투 동안 벌어진 푸아의 사망으로 루이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는 작전을 수행하지 않으려던 자크 드 라 팔리스의 지휘하에 놓인 프랑스군은 그의 명령으로 라벤나를 철저하게 약탈했다.[28]

1512년 5월, 프랑스의 위치는 상당하게 변했다. 율리오 2세는 또 다른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했고; 공국을 그의 가문이 되찾기로 결정한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가 이끈 그들은 밀라노로 향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로마냐를 포기했고 (우르비노 공작이 볼로냐와 파르마를 빠르게 점령하면서) 스위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롬바르디아로 퇴각했다. 8월에 스위스는 베네치아군과 합류하여 밀라노에서 트리불치오를 몰아냈고, 그들의 지지와 함께 스포르차를 공작으로 선언하였다; 라 팔리스는 알프스를 넘어 퇴각 할 수 밖에 없었다.[29]

8월 말 동맹국들은 이탈리아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만토바에서 만났다(부분적으로는 프랑스에게서 획득한 영토 분활). 그들은 빠르게 피사 공의회에서 루이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여 율리오 2세를 화나게 한 피렌체를 다루기로 동의를 했다. 교황의 요청으로, 라몬 데 카르도나는 피렌체의 저항을 분쇄하며 토스카나로 진격했고, 공화정 정부를 무너트리고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세웠다.[30]

그러나 영토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불합의는 빠르게 벌어졌다. 율리오 2세와 베네치아는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를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로 유지하려한 반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과 페르난도 1세는 그들의 친척을 공작으로 세우려했다. 교황은 페라라를 교황령으로의 즉시 합병을 요구했고; 페르난도는 독립적인 페라라의 존재로 교황령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서 그 사항을 거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베네치아를 향한 황제 막시밀리안의 태도였다. 황제는 베네토의 대부분을 그의 눈에 두고 있던 어떠한 제국령 영토에 대한 포기를 거부했고; 그것은 공화국에게 있어서 종말이였다, 그는 마지막 분할에서 베네치아를 완전히 제외시키기로 교황과 합의를 맺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 사항을 거부하자,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 맞서 캉브레 동맹을 다시 일으킬 것이라 위협했다. 이에 대항해 베네치아는 루이에게로 편을 돌려 1513년 3월 23일 프랑스와 베네치아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모든 영토를 나누기로한 조약이 블루아에서 체결됐다.[31]

프랑스-베네치아 동맹[편집]

1512년 5월 말,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진격했고; 동시에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파도바에서 서쪽으로 진군했다. 밀라노인들에게 있어서 스위스 용병대의 애완견이라고 여겨지며 인기가 없었던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는 약간의 저항과 함께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를 지나가도록 허용하였고; 밀라노를 점령한 트레무아유는 잔여 스위스 용병들이 있던 노바라를 포위했다. 6월 6일, 프랑스군은 노바라 전투에서 스위스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수가 사망했지만 퇴각해냈다.[32] 스위스 용병 파견대는 프랑스군이 알프스 너머로 도망치기를 바랬고 매수당하여 퇴각하기 이전에 디종에 다달았다.[33]

노바라에서의 후퇴는 프랑스 동맹의 계속된 패배를 알리는 신호였다. 헨리 8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테루안을 포위하였고, 앙긴가트 전투에서 라 팔리스를 격퇴시켜내고 투르네를 점령했다. 나바라에서는 페르난도의 침입을 막는데 실패했고; 그는 재빠르게 나바라 전역을 점령하였고 기옌에서 잉글랜드의 공세를 지원하러 움직였다.[34]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루이의 요청으로 잉글랜드를 공격했지만;[35] 프랑스에서의 잉글랜드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고, 1513년 9월 9일 플로든 전투에서 대재앙적인 패배를 겪는 와중에 왕이 전사하면서,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스코틀랜드의 짧은 참전이 끝이 났다.

1515년, 프랑스-베네치아 동맹군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신성 동맹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한편 예상과 다르게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한체 남겨진 달비아노는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근접해지길 바라며 베네토로 퇴각하였다. 그동안 스페인군은 완강한 베네치아의 저항에 파도바를 점령할 수 없었고, 그들은 베네치아 영토로 깊숙히 들어가 9월 말에는 베네치아 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였다. 카르도나는 베네치아에 포격을 가했으나, 큰 효과를 주지 못 했고, 해구를 가로 지를 배가 없자, 롬바르디아로 퇴각했다. 베네치아 귀족들에게서 수 백병의 자원병을 보충한 달비아노는 카르도나를 뒤쫒았고 10월 7일 비첸차 외각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라모타 전투의 결과로, 베네치아군은 대패를 했고, 도주하던 많은 유력 귀족들이 성벽 외각에서 사망했다.[36]

그러나 신성 동맹은 이 승리를 이어가는데 실패했다. 카르도나와 달비아노는 남은 1513년과 1514년 내내 프리울리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였지만, 카르도나는 어떠한 진전을 이뤄내는데 실패했다. 중요 영토 점령에 실패한 헨리 8세는 프랑스와 단독 강화 조약을 채결했다.[37] 마침내 율리오 2세의 사망으로 동맹은 지휘관을 잃은체 남게 되었고; 율리오 2세의 후임자인 교황 레오 10세는 군사적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의 사망으로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대관식에서 밀라노 공작 작위를 칭한 프랑수아는 이탈리아내 그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7월 프랑수아는 도피네에서 군사를 소집했다. 교황령과 스위스 연합군은 알프스를 넘어 오는 그에 맞서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군대를 움직였으나,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조언을 따른 프랑수아는 주요 길을 피하고 대신에 스투라 계곡을 통해 진군했다.[38] 프랑스 선봉 부대는 빌라프란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급습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사로 잡는 한편 프랑수아와 본대는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와 맞섰다. 스위스군은 초기에 전진을 하며 전투에 진전을 이뤘지만, 기병과 공성 무기에서의 우세와 9월 14일에 도착한 달비아노의 지원군(베로나에서 카르도나를 피하는데 성공하며)은 프랑수아와 베네치아에 전략적으로 대승을 이끌었다.[39]

여파[편집]

마리냐노에서의 패배 이후, 신성 동맹은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나 의지를 더 이상 가지지 못 했다. 프랑수아는 밀라노로 진격하여, 10월 4일에 점령해내고 스포르차 가를 몰아냈다. 12월에 그는 스위스 용병들에게 버려진 교황 레오 10세를 만났으며, 교황은 파르마피아첸차를 프랑수아에게, 모데나페라라 공작에게 넘겨주었다.[40] 그에 대한 보답으로,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국에 대한 그의 공격에 대해 프랑스가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받았다. 마침내 1516년 8월에 프랑수아와 카를 5세 사이에 체결된 누아용 조약으로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 권리와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전쟁에서 스페인이 빠질 것임이 재확인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롬바르디아를 재차 침입할 시도를 벌였으나, 그의 군대가 밀라노에 도달하기 이전에 귀환에 실패하자, 1516년 12월에 그는 프랑수아와 협상에 들어갔다. 브뤼셀 조약으로 프랑스의 밀라노 차지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롬바르디아 지역에 잔여 제국령 영토(크레모나를 제외)에 대한 베네치아의 권리를 인정함으로서, 1508년 상태로 되돌려냈다.[41] 하지만 평화는 4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는데; 1519년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은 그 자리를 역시 노리고 있던 프랑수아에게 하여금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을 시작하게끔 야기하였다. 다시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1530년까지 계속되었다.

참고[편집]

  1. Mallett and Shaw, The Italian Wars, 56–57.
  2. Norwich, History of Venice, 390.
  3.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168–175.
  4. Norwich, History of Venice, 391.
  5. Norwich, History of Venice, 392.
  6.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189–190.
  7. Norwich, History of Venice, 393.
  8. Norwich, History of Venice, 394–395
  9.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196–197; Shaw, Julius II, 228–234
  10. Taylor, Art of War in Italy, 119.
  11. Norwich, History of Venice, 399–400.
  12. Mallett and Shaw, The Italian Wars, 90.
  13. Norwich, History of Venice, 401–402.
  14. Mallett and Shaw, The Italian Wars, 94.
  15. Norwich, History of Venice, 404.
  16. Norwich, History of Venice, 405.
  17. Norwich, History of Venice, 406.
  18. Guicciardini, Storia d'Italia, 806–812.
  19. Norwich, History of Venice, 408–409.
  20. Norwich, History of Venice, 410–411.
  21. Rowland, "A summer outing in 1510".
  22. Norwich, History of Venice, 415.
  23. Norwich, History of Venice, 417.
  24.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216.
  25.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227.
  26. Hutchinson, Young Henry: The Rise of Henry VIII, 159.
  27.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244.
  28. Norwich, History of Venice, 422.
  29. Norwich, History of Venice, 423–424; Oman, Art of War, 152.
  30. Hibbert, Florence, 168.
  31. Norwich, History of Venice, 425.
  32. Oman, Art of War, 153–154; Taylor, Art of War in Italy, 123.
  33. Goubert, Course of French History, 135.
  34. Kamen, Empire, 35.
  35.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280.
  36. Norwich, History of Venice, 429.
  37.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282.
  38. Norwich, History of Venice, 430.
  39. Norwich, History of Venice, 431.
  40.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290.
  41. Norwich, History of Venice, 432.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