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15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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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코냑 동맹 전쟁의 일부
Sack of Rome of 1527 by Johannes Lingelbach 17th century.jpg
날짜1527년 5월 6일
장소
결과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Emblem of the Papacy SE.svg 교황령

Charles V Arms-personal.svg 카를 5세의 제국:


Coat of arms of the House of Gonzaga-Guastalla.svg 구아스탈라 공국
지휘관
Emblem of the Papacy SE.svg 교황 클레멘스 7세 (POW)
Emblem of the Papacy SE.svg 카스퍼 뢰이스트 
Emblem of the Papacy SE.svg 렌초 디 체리
Coat of arms of the House of Gonzaga-Guastalla.svg 페란테 곤차가
Charles V Arms-personal.svg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Charles V Arms-personal.svg 필리베르 드 샬롱 (WIA)
병력
민병대 5,000
스위스 근위대 189
20,000
피해 규모
병사 500(사망, 부상, 포로)
시민 45,000(사망, 부상, 망명)
미상

로마 약탈(1527)은 코냑동맹전쟁(1526-1530)이 진행중이던 1527년 5월 6일에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로마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약탈로 인한 피해는 과거에 있었던 그 어떤 로마약탈(사코 디 로마)사건보다 처참하고 컸으며 성도 로마는 도시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으며 산탄젤로 성에서 수개월간 자진하여 셀프유폐생활을 하였다. 이후 황제 카를 5세(생몰1500-1558)가 헛기침만 하여도 부들부들 떨정도로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 사건을 통해 코냑동맹군(프랑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교황령)과 신성로마 제국군간에 벌어진 코냑 동맹전쟁(1526-1530)에서 제국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음이 드러났다. 결국 코냑 동맹전쟁은 1530년에 동맹군이 패배하여 제국군의 승리속에 종료되었다. 교황령에 대한 공격은 황제의 명령으로 수행되었으며 교황이 동맹결성과 전쟁을 주도하여 황제에게 정면으로 대항함에 따라 전쟁의 적대국가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는 평소 황제에게 대적하며 친프랑스적이면서 편파적인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과거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선출시 카를 5세가 황제로 선출되는것을 반대했었기에 묵은 감정에 대한 앙갚픔 성격도 있었다.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 잉글랜드로 튀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 그가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재위1509-1547)다. 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혼인무효선언) 허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교황들이 국왕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였으나 이번 만큼은 그럴수 없었다. 그 이유는 헨리 8세의 왕비인 캐서린(생몰 1585-1536)이 바로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황제 카를 5세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교황를 갈아치울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금번 로마약탈을 통해 그 위력을 과시한바 있다. 교황은 자신의 코가 석자인터라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계속 협박과 으름장을 놓는 황제의 뜻을 감히 거역할수 없는 처지였다.

배경[편집]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편집]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이후 왕권이 강화되며 점차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다. 국정이 안정화 되면서 국가역량의 결집이 가능하게 되었고 국력의 원천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이자 중심국가로 자라잡게 되었다. 이런 프랑스를 긴장하게 만든것은 스페인의 급부상이다. 1492년 레콩키스타(영토회복운동)를 완성하며 신흥 강대국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와 시칠리아도 통치하고 있었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도 선도적 국가였다.

설상가상으로 1519년에 스페인과 독일-오스트리아를 호령하는 젊은 황제 카를 5세가 등장하며 유럽의 국가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카를 5세의 출현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주변국가들의 견제와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무력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세기말에 포르투갈의 노력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으나 아직 초기시대라 새로운 항로를 통한 무역이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한 상황이였다. 따라서 여전히 지중해는 국제무역에 있어서 매력적인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유럽 강대국들은 지중해의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탈리아 반도내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해야 했다.

도시 로마의 상징성[편집]

도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는 과거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문명과 정신이 깃든곳이였다. 유럽각국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지도국가의 지위를 공인받기 위해서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했다. 또한 유럽이 카톨릭화 되면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가 카톨릭문화와 정신문명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이 카톨릭의 수호자이자 대륙의 지도자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황으로부터 공인받아야 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와 로마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 각국의 패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 반도는 십여개의 작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외세침략에 적절히 대응을 하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40대 젊은 교황의 등장[편집]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에 재위 초반의 유럽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내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두나라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걸린 다툼으로 비추어지기도 한 이 싸움은 16세기 전반기에 출현한 젊은 황제 카를 5세(생몰 1500-1558)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생몰 1494-1547) 간에 주로 벌어졌다. 이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자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평화와 정국 안정을 지키기 위해 두 강대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나칠정도로 오락가락하는 교황의 행보로 인해 로마의 지방귀족들과 추기경들의 반발이 심했고 혼란을 부추기는 면도 있었다.

코냑동맹 결성[편집]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제국군에게 전멸되며 대패하였고 국왕 프랑수와 1세 마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식을 접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충격을 받았다. 황제 카를 5세는 이미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왕국과 시칠리아도 다스리고 있었는데 전쟁승리로 인하여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도 커진것이다. 이로인해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코냑동맹으로 명명된 이 동맹에는 베네치아,밀라노,피란체,프랑스,교황령이 참여하였다. 교황이 동맹결성을 주도하였으나 최종조약 체결은 1526년 5월에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스포르차 가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동맹군 총사령관은 우르비노 공작이 맡았다.

카를 5세가 1521년에 프랑스에게서 밀라노를 탈환한직후 프란체스코 2세를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인 공작으로 임명한바가 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 2세의 권력은 밀라노를 점령하고 있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제한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코냑동맹에 합류하였다. 프랑스가 동맹에 참가한 이유는 지난 1525년에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한것에 대한 복수 차원이였다. 프랑스 단독으로는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꺽을수 없다고 프랑수아 1세는 판단하였던 것이다.(프랑수아 1세는 1526년 2월에 포로에서 석방되었다.)


코냑동맹전쟁의 시작[편집]

코냑동맹군이 롬바르디아로디를 함락하는 등 북이탈리아를 장악해나가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격노하였다. 특히 카를 5세가 복위시켜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재위 1521-1535)의 배신에 분노했다. 제국군이 반격을 가하여 밀라노를 점령한후 스포르차 가문을 몰아내버렸다. 이때 코냑동맹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프랑스 군은 파비아 전투(1525년)의 트라우마로 인해 전쟁에 소극적이였고 베네치아는 자국의 사정을 핑게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나머지 도시국가들도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제국군과의 직접적인 정면대결을 피하며 물리적인 거리를 일정하게 두었다.

샤를이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34,000명은 전례없는 교황령의 수도 로마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샤를 휘하의 스페인 군사 중 6,000명을 제외하고,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 휘하의 란츠크네흐트 14,000명과 파브리치오 마라말도, 스키라 콜론나, 루이지 곤차가, 페란테 1세 곤차가, 오라녜 공작 필베르트 등이 지휘한 일부 이탈리아 보병 연대는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신성로마제국군은 북부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용병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여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러던중 로마에 대한 공격명령은 즐거운 일이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로마를 약탈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인 병사들은 마틴 루터사상에 심취한 루터파 교도들로서 종교적인 이유로 교황령 수도 로마를 반드시 점령하겠다는 결의에 차있었다.

1527년 4월 20일 피렌체에서 교황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에 대항하는 봉기가 발생하자 메디치 가문 일족은 이들을 피해 아레초로 망명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길을 따라 아쿠아펜덴테와 산로렌초알레그로테를 점령하였으며, 5월 5일 비테르보론칠리오네마저 점령하고 로마 성벽에 다다랐다. 교황 글레멘스 7세는 황제가 아무리 분개했기로서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알려진 황제의 군사들이 설마 교황령, 그것도 성도(聖都) 로마를 침공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제국군이 로마에 나타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닭고 크게 당황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충언[편집]

당시 피란체의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일찍이 '군주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단련된 정규군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대부분 각자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벌이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통념상 마키아벨리의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 유지라는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교황령에도 정규군은 없었기 때문에 스위스 근위대와 용병 그리고 급조한 시민군으로 제국군에 대항하였다. 결과는 뻔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교황령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약탈[편집]

헴스케르크가 그린 로마 약탈.

무너지는 성도 로마[편집]

로마를 지키는 병력은 신성 로마 제국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처음부터 농성전을 통한 방어전이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무리수였다. 당시 로마를 지키고 있었던 병력은 렌초 디 체리가 이끄는 5,000명의 군인과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뿐이었다. 도시를 감싼 성벽은 단단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군은 훌륭한 포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국군 지휘관 샤를은 포위하고 있는 로마와 언제 후방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코냑동맹군 사이에 끼이게 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서둘러 공성전을 시작했다.(샤를은 부르봉 공작이였으나 1523년에 프랑스 국왕으로 부터 작위를 박탈당한후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카를 5세 밑에서 군지휘관으로 복무함)

신성 로마 제국 군대는 잔니콜로바티칸 언덕 쪽에 있는 성벽들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전투중에 지휘관인 샤를(생몰1490-1527)벤베누토 첼리니가 쏜 총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용병들은 급료지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불만이 가득했었는데 존경하던 지휘관 샤를마저 전사하자 분노하였다.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무너진 성벽을 통해 제국군인들이 앞다투어 물밀듯이 쳐들어갔고 도시 로마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전사한 샤를을 대신하여 필리베르 드 샬롱이 지휘를 이어받았지만 샤를의 죽음에 흥분한 병사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성[편집]

제국군대가 로마시내로 쏟다져 들어오자 교황청에서 고용한 각 나라의 용병들은 싸움을 피하여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 만큼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중에 500명 중 189명만 살아남게 되었는데, 이들 역시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겨우 42명만이 남게된다.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충성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오히려 교황에게 피신할것을 당부한후 베드로 대성당 근처로 몰려드는 제국군대와의 싸움에서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희생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베드로 성당에서 약 900m 떨어진 곳에 있는 산탄젤로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교황과 측근들의 도피는 바티칸에서 산탄젤로 성까지 이어진 비밀 통로 파세토 디 보르고를 통해 이루어졌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목숨을 받쳐 충성을 다한 이들의 용맹함으로 인해 이후 스위스 용병들만이 교황청 근위대에 기용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매년 5월 6일 되면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용병들은 충성서약을 하는데 이는 1527년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본격적인 약탈[편집]

시내로 진입한 제국군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흥분한 제국군인들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과 살육, 파괴를 자행하였다. 제국군인들이 강도로 돌변하여서 로마시내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지휘관인 필리베르트가 병사들에게 약탈중지를 명했지만 이를 따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조금이라도 값이 나가는 물건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뜯겨나갔고 빼앗기며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는 초토화되며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르네상스 시절의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도시로서의 로마 성립 이후 사상 최악의 피해가 발생했다.

포로가 된 교황군 병사들은 잔혹한 방식으로 공개 처형되었으며 성당과 수도원은 물론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의 저택이 대거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심지어 신성로마 제국과 친분이 있는 추기경들도 폭도로 돌변한 병사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액의 금전을 바쳐야 했다. 수녀를 포함하여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강간당한후 살해되었다. 기둥에 못박힌후 죽임을 당하는 이가 부지기수였고 그 참혹함은 아비규한(阿鼻叫喚)의 지옥에 가까웠다.

제국군의 상당수는 독일 루터교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그 어떠한 일말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약탈을 자행했다. 그동안 루터교도들은 이단으로 취급되며 강제개종을 강요받았고 갖은 수치와 고문을 받다가 화형당하기도 했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에도 얀 후스등이 처형당하는등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탄압을 많이 받아왔다. 어떻게 보면 이번 로마 대약탈 사건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막나가던 부패한 교황청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마 약탈의 역사]

No   발생 년도   사건 내용   &   침략 민족      비   고
1 BC  390년   갈리아인(켈트족)들의 약탈
2 AD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약탈
3 AD  455년  게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의 약탈
4 AD  546년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의 약탈
5 AD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의 약탈
6 AD 1527년  카를 5세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군의 약탈
7 AD 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 해체


5월 8일경, 클레멘스 7세와 적대 관계였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추종자들과 농민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과거 1526년 교황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로마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한 콜론나 추기경은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저택에서 수많은 로마 시민을 보살폈다.

한편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계속 칩거 중이었다. 6월 1일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살루초의 미켈레 안토니오가 로마 북부 몬테로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던 이들은 광폭한 신성 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6월 6일 클레멘스 7세는 항복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에 파르마와 치비타베키아, 모데나를 양도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는 대가로 400,000 두카트의 몸값을 지불하라는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행한 것은 후자뿐이었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리미니로 돌아갈 즈음 베네치아는 체르비아라벤나를 획득하기 위해 그의 상황을 이용하였다.

영향[편집]

스페인에 머물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로마 약탈 소식을 접하고 무척 당황하고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대항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군대와 도시를 잃고 산탄젤로 성에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카를 5세는 로마 약탈에 부분적으로는 책임이 있는데, 이는 그가 클레멘스 7세를 개인적으로 만나 자신의 요구사항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군대에게 자율성을 부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를 언짢게 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와의 어떠한 충돌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떠한 주저함과 조건 없이 클레멘스 7세는 울트레흐트 교구의 세속 재산을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도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1528년, 카를 5세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많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1530년 2월에 카를 5세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서의 대관식에 왕관을 씌워주게 되었다. 이후에는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칠수 밖에 없었다. 또한 클레멘스 7세는 어찌나 트라우마가 심했던지 예술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여 시스티나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한다.

로마 대약탈은 교황령 역사상 최악의 수난이자 굴욕으로 이 사건이후 교황들은 강력한 황제인 카를 5세가 헛기침만 해도 벌벌 떠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코냑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곧 르네상스 시대의 종국을 의미했다. 마틴루터에 의한 종교분열(1517)의 문제해결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에 의해 주도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교황의 명목상 권한마저 축소되고 말았다.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압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1077년)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또한 기독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 타격을 가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였다.

     

1534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면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분리, 독립하여 성공회를 만드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만들었다.

출처[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