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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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유재하.jpg
기본 정보
출생 1962년 6월 6일(1962-06-06)
경상북도 안동
사망 1987년 11월 1일 (25세)
서울특별시 한남대교 북단 강변도로
직업 싱어송라이터
악기 기타, 피아노
활동 시기 1984년 ~ 1987년
가족 아버지 유일청
어머니 황영
누나 2명
형 2명
종교 천주교(세례명: 미카엘)
웹사이트 유재하음악장학회

유재하(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이다. 1987년 1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남기고 교통사고로 인하여 25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1]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서 이 앨범의 영향과 가치가 인정받아 대한민국 가요계의 전설로 남아있는 가수이자 작곡가이다.

생애[편집]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사업가였던 부친 류일청씨와 모친 황영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2] 1969년 은석국민학교를 입학했고, 1975년 삼선중학교에 입학했다.[3]

1981년대일고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 순수 음악을 전공하였지만, 대중 음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과 음악적인 교류를 했다.[2] 작곡 뿐만 아니라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그는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4]

경력[편집]

대학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86년김현식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였다. 김현식에게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 주었다.[5] 하지만 밴드 멤버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기에 탈퇴했다.[4]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는 김현식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그랬다는 설도 있다.[5]

1987년 8월에는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이 음반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6]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7] MBC 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8] 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 번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유일한 TV 출연이었다.

죽음[편집]

음반 발표 후인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 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술에 취한 친구 성모씨가 몰던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사망후 일반인들과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으며,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10]

스물 다섯해라는 짧은 삶에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겼지만 '발라드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김광진, 신승훈 등의 후배 음악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유재하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1989년부터 계속되고 있다.[3] 혹자는 만약 유재하가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특히 발라드의 역사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 말한다. 비록 한장의 유작 앨범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의 음악 전부이지만, 그만큼 우리 한국 음악계에 전해진 그의 음악적인 역량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사후[편집]

사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을 기탁하여 '유재하 음악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1회 대회 수상자인 조규찬을 필두로 유희열, 고찬용,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등이 대표적이다.[10] 작곡가 김형석이 음악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노래가 계기가 되었다.[11]

또한 유재하의 노래는 1985년 조용필을 필두로 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정수라, 나얼, 백지영, 김조한, 박정현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특히 1997년에는 후배 음악가들이 헌정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를 발표하였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에픽하이2집 앨범에서 〈11월 1일〉이란 곡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추모했다.[12]

앨범 발표 당시 크게 히트하지 않았던 〈우울한 편지〉는 2003년 영화살인의 추억》에서 범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로 영화에 삽입되어 다시 히트하기도 하였다.[13]

음악성[편집]

유재하는 한양대 작곡과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의 악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14] 임진모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작사 작곡 솜씨도 뛰어났다. 악기에 능통한 덕분이었지만 편곡까지 도맡았다는 점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말했다.[10]

약력[편집]

밴드 활동[편집]

학력[편집]

음반[편집]

인간 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11월 1일…故 유재하·김현식을 추모하며 《일간스포츠》, 2008년 11월 1일 작성
  2. “[대중음악가 열전] 6. 뮤지션 유재하”. 《부산일보》. 
  3. 요절한 류재하-김현식, 아직도 당신은! 《조이뉴스》, 2006년 11월 1일
  4. “[추억의 LP 여행] 유재하”. 《데일리한국》. 
  5. 이상훈. “아! 故 유재하! 그가 없어 더욱 텅빈 오늘…11월 1일”. 
  6. 故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여주인공은 '플루트 김' 《마이데일리》, 2008년 11월 8일 작성
  7. 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 《경향신문》, 2007년 8월 23일 작성
  8. “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 
  9. 휴지통 《동아일보》, 1988년 8월 3일
  10. 임진모. “사랑하기 때문에”. 《이즘》. 
  11. “[스타메이커] 작곡가겸 음반제작자 김형석”. 《한국일보》. 2003년 6월 18일. 
  12. 경향신문 (2007/08/23). “대중음악 100대 명반 ‘들국화’1위”. 
  13. 주간한국 (2007/12/06).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류재하 1집 '사랑하기 때문에'/ 1987년 서울음반”.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4. “[커버스토리]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 《경향신문》.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