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나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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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나라 하라(烏拉那拉氏, 만주어: ᡠᠯ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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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a Nara Hala)는 오라씨(烏喇氏)라고도 한다.[1][2]

효경헌황후(孝敬憲皇后, 만주어: ᡥᡳᠶᠣᠣᡧᡠᠩᡤ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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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yoošungga Enggun Temgetulehe Hūwangheo

만주족 나라 하라의 지파로 우라의 마지막 버이러(貝勒, Beile)인 부잔타이(布占泰, 만주어: ᠪᡠᠵᠠᠨᡨᠠᡳ Bujantai)의 후손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오랍합살호패륵후배당책(烏拉哈薩虎貝勒後輩檔冊)》에 따르면, 그 시조는 금나라의 황족 완안씨의 후손인 나치불우(納奇卜祿, 만주어: ᠨᠠᠴᡳᠪᡠᠯᡠ Nacibulu)로 16세기 후반 훨운국이 울아갸(烏拉街, 만주어: ᡠᠯ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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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a Giya) 일대로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3]

누르가치의 본래 세력 기반인 건주여진의 니루(만주어: ᠨ᠋ᡳᡵᡠ Niru) 편성을 대체로 기존 조직을 기반으로 했고, 니루의 규모도 다른 여진족보다 컸다. 그러나 통일 전쟁에서 저항이 심했던 해서여진은 이와 달랐다. 누르가치는 복속된 해서여진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해서여진이 자신들만의 니루를 구성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발적으로 누르가치를 따르거나 과거의 친교관계를 유지해 온 소수의 해서여진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조각조각 분리되어 건주여진 니루에 배속되었다.

오랍가만족향 진정부(镇政府)

누르가치는 이런 방식으로 팔기를 조직함으로써 통일된 여진족의 결합력을 강화하고 반란 가능성을 제거하였다.[4]

신해혁명으로 무능하고, 부패가 절정인 봉건전제의 청 제국이 와해되었지만, 진정한 공화정치가 실현되지 못하고 군벌의 통치가 뒤를 이었으며 민족 차별 정책이 수반되었다. 전국 각지의 주방팔기(駐防八旗)들은 예를 들어 서안·남경·항주·형주 등지에서 무고한 만주족 관병을 살해하는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에 따라 만주족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족(漢族)의 성씨로 바꾸는 것이 적지 않았다. 만주족이 많은 북경지역에서는 소수의 달관 · 현귀이기 때문에 족속과 성씨를 바꿀 방법이 없는 사람 이외에 일반적으로 만주인들은 족속과 성씨를 바꾸는 숫자가 적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는다면 입에 풀질하고 살 방도조차 찾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직장이나 일자리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5] 따라서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대부분의 우라나라씨는 한성(漢姓) 조(為)씨로 가장했고, 일부는 동(桐), 강(相) 성을 사용했다.[6]

각주[편집]

  1. 金毓黻 编; (清) 杨同桂 辑 (1985). 《辽海丛书·沈故》. 辽沈书社. 327~328쪽. 
  2. 昭梿 (1980). 《啸亭杂录》. 中华书局. 316쪽. ISBN 9787101017519. 
  3. 赵东升; 宋占荣 (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志办公室. 133쪽. 
  4.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ISBN 9788994606514. 
  5. 金啓孮,《滿族歷史與文化簡編》, 327쪽
  6. 赵力 (2012).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404쪽. ISBN 9787549702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