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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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守奉. ?-?)은 조선 후기의 노비 출신 지주로, 경상도 단성현심정량가의 외거노비였다.[1] 수봉은 경제력을 활용해 평민으로 올라섰다.[2]

외거노비로서 재산을 축적하여 자신의 농토를 마련, 조선 조정에 돈을 바치고 노비에서 해방되어 평민이 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직을 얻었다. 성도 본관도 없던 그는 김씨 성과 김해 본관을 획득하여 김해 김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단계적으로 족보를 세탁, 자손을 서원 원생으로 넣거나 타지역으로 이사, 이름 개명 등을 시도했고, 그의 4대손 김성종과 김종원은 안동 김씨로 본관을 바꾸는데 성공한다.

그의 후손들은 김해김씨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수봉의 고손자 김종옥은 본관 갈아타기도 감행했다. 1825년 도산면에서 김해 김씨보다 위세가 높던 안동 김씨로 바꾼다.[2] 고려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권내현의 추적을 통해 수봉과 그의 후손 6대의 신분세탁 과정이 2012년 밝혀졌다.

생애[편집]

생년월일은 미상이며 그는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일부)에 살던 양반 심정량(沈廷亮)가문의 노비였다.

수봉은 성(姓)이 없는 노비였다.[3] 아버지 어련과 할아버지 이동 역시 직역이 호적에 없었다.[4] 그의 집안이 어떤 이유로 노비가 되었는가와 수봉이 솔거노비에서 외거노비가 되었던 배경은 알려져있지 않다.

수봉은 심정량이 소유하고 있던 59명의 노비 중 한 명이었다.[4] 노비였지만 그는 따로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 외거노비였던 그는 주인 심정량 집안에 일정한 세금인 신공을 바쳤다. 노비였던 그가 어떻게 농토를 획득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살 당시 당시에는 노비들도 재산을 상속받고 재산을 모아 토지를 사는 것이 가능했다.[4] 수봉은 “도망이라는 방법보다 그가 가진 재산을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4]

1678년(숙종 4년) 당시 그는 단성현의 호적대장 중 심정량가문의 노비로 호적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1718년(숙종 44년)의 호적에 그는 김씨 성과 김해라는 본관을 얻었다. 학자 권내현은 1718년의 김수봉의 호적과 1678년의 심정량 가문의 호적 노비 명단, 김수봉의 장인 이금금이라는 이름과 심정량 가문의 노비 금금이의 이름이 동일한 것을 확인하였다.

1678~1717년 사이에 사노비 신분에서 해방된 수봉은 김씨 성을 획득하였다.[5] 수봉은 조선이 숙종 때 을병대기근(1695~1696)을 거친 이후에 평민의 신분을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4] 숙종 때인 1678~1717년 당시 정부는 노비 면천 문서나 통정대부 등에 임명하는 공명첩을 팔아 기근 진휼 재정을 확보했다.[2] 수봉은 재산을 내고 합법적으로 평민이 되었던 것이다.[2] 평민의 신분을 사들인 그는 김씨 성과, 김해라는 본관을 획득하고 김해 김씨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추가로 납속을 하여 통정대부라는 관직을 받았다.

그의 아들들은 평민 신분으로 군역에 올랐다가 다시 아들 김흥발1750년(영조 26년) 가선대부에 올랐다. 수봉의 다른 아들 김흥창 역시 재산을 조정에 헌납하고 1732년 납속절충장군에 올랐으며, 1750년 다시 납속절충장군의 직책을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가 되었지만, 일부는 안동군 도산면 등 타지역으로 이사한 후 다시 호적을 세탁하여 안동 김씨에 편입되었다.

후손들의 신분 세탁 과정[편집]

노비에서 해방되고 성과 본관을 획득한 그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로 살아갔다. 1717년 김흥발은 조부·증조부·외조부의 직역을 기재하지 않았었다.[3] 그런데 1720년 김흥발은 호적대장에 조부·증조부를 정병(正兵)으로 적었다. 평민의 직역이다. 외조부도 평민에 해당하는 양인(良人)이라 썼다.[3]

수봉의 아들 김흥발은 재산을 이용해 아들들을 서원 원생으로 집어넣었다.[3] 공부 중이면 군역이 면제됐기 때문이다.[3] 그리고 벼슬 얻지 못한 양반의 직역인 유학(幼學)을 호적대장에 거짓으로 썼다. 이렇게 노비의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3] 김흥발의 아들 김소명은 서사낭청까지 올랐고, 금학의 아들 김해발은 어영군에 속해있다가 1759년(영조 35년) 무관직인 전력부위에 올랐다.

수봉의 증손자 김○오는 21세였던 1759년까지는 평민 군역자였으나 경제력을 배경으로 41세였던 1780년 마침내 유학(幼學)이 되었다.[4]

김광오는 1780년(정조 4년) 양반들이 독점했던 ‘유학’이란 호적상 직역에 제일 먼저 진출했다.[5] 그러나 김광오는 1783년(정조 7년) 다시 중간층의 교생으로 강등되었다.[5] 수봉의 4대손 김성종은 단성이나 도산면이 아닌 신등면으로 이사가고, 본관을 안동 김씨로 바꿨다. 수봉의 다른 4대손 김종원도 다른 곳으로 이사가서 본관을 다시 안동 김씨로 바꿨다.

수봉이 거주했던 도산면에서는 1678년에서 1717년 사이에 노비 인구가 42%에서 27%로 감소했다. 노비들은 신분 상승 과정에서 성과 본관도 함께 얻었다.[4] 그러나 근처의 양반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들과 혼인관계나 교류를 하지 않았다.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이동
  • 아버지 : 어련
  • 어머니 : 이름 미상
  • 부인: 이소사(李召史)
    • 아들 : 김흥발(金興發, 1668년 - )
    • 며느리 : 변소사, 친정어머니와 외조부는 노비
      • 손자 : 김소명
    • 아들 : 갓동이(㖙同伊)
    • 아들 : 김흥창(1677년 - )
      • 손자 : 김해발
    • 아들 : 금학(金鶴)
      • 손자 : 김세우
    • 딸 : 김소사(1684년 - )
    • 사위 : 박끝용(朴末龍 1684년 - ), 노비 출신으로 1729년 평민신분 획득, 본관은 밀양.
  • 장인 : 이금금(李今金) 또는 금금이(金金伊), 사노비, 이생의 아들
  • 이종사촌 : 실동
  • 사돈 : 변담, 며느리 변소사의 친정조카. 평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신분을 세탁했다.[6]

노비 소유[편집]

원래 노비 출신이었던 수봉도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수봉이 거느리던 노비 중 한명인 큰아지(大阿只)는 양인 옥상과 비(여자 노비) 순옥 사이에서 태어났다.[7] 큰아기의 어머니 순옥은 여자 노비였지만, 아버지 옥상은 양인, 평민이었다. 그러나 노비종모법에 따라 순옥의 자녀들은 노비가 되었다.

그런데 인근 법물야면 구술에는 옥상과 순옥 사이에서 태어난 일례라는 또다른 여자 노비 1명이 있었다.[7] 일례는 노비에서 속량된 박기룡의 부인이었다.[7]

노비 종모법[편집]

순옥은 수봉 집안의 노비였다. 수봉의 아들 갓동이에게는 최소 3명의 노비가 있었고, 그 중 2명은 어머니가 순옥이다.[7] 순옥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수봉의 노비가 되었고, 평민인 옥상과 결혼해서 두 딸이 생기자 그도 수봉의 소유가 되었다. 수봉이 죽으면서 두 딸은 수봉의 아들 개똥이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역시 사노비였던 수봉의 부인 이소사는 이씨 성이 있었고[8] 친정아버지는 이금금(李今金)이었는데, 이금금의 아버지는 이생(李生)이라 한다. 그러나 이금금은 노비였고, 다만 이금금의 아버지가 이씨라는 것만 전할 뿐, 이생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여부와 이생의 정확한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다.

수봉의 사위 박끝용의 호적에 의하면 처외조부 이금금의 본관은 영동(永同)이라 한다.

기타[편집]

  • 수봉의 이종사촌 실동은 경제력을 배경으로 자신의 아들 세명 중에 장남을 먼저 면천시켜, 평민 군역자로 만들어주었다.[9]
  • 수봉이 살던 시대인 1764년에는 한양 복판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족보장사를 하다 적발되는 사건도 터졌다. 18세기 들어 하층민의 대대적인 ‘신분 세탁’이 시작되었다.
  • 수봉과 함께 심정량 가문의 외거노비였던 신원은 풍덕에 거주했는데 주인에게 신공을 바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잠적하였다. 1750년(영조 26) 심정량의 아들은 신원을 자신의 노비 대장에 등재하였다. 신원의 후손들을 찾았을 때 그 근거로 그들에 대한 소유권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1]
  2. 평민의 양반 되기 '성씨·족보를 내 품에' 한겨레 2014.09.14.
  3. [책 속으로] 노비 집안 어떻게 양반이 됐나 … 호적대장 200년 미스터리 중앙일보 2014.09.13.
  4. [책과 삶] 노비 출신 평민 후손, 이름 자주 바꿔 '호적세탁' 경향신문 2014.09.20.
  5. 풀려난 노비 ‘수봉이’가 김해 김씨 고른 이유는 서울신문 2012.03.06.
  6.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012년 봄 호:통권 98호>, (역사비평사, 2012) pp.293
  7.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86페이지
  8. 노비는 성과 본관이 없었다.
  9.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87페이지

참고 자료[편집]

  •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012년 봄 호:통권 98호>, (역사비평사, 2012) pp.269~298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