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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金益達, 경상북도 상주군, 1916년 5월 9일 ~ 1985년 11월 2일)은 대한민국언론인이자 출판인이다. 호는 학원(學園)이다.

생애[편집]

초기[편집]

1916년 경상북도 상주군 화서면에서 아버지 김응원과 어머니 김안동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24년 대구로 이사하여 해성보통학교에 전입하고, 1928년 해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5세가 되는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서점 점원·신문 배달 등을 하면서 와세다 대학 통신강의록으로 상과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때 출판인으로의 청운의 뜻을 세우게 되었다. 오랜 객지 생활로 폐결핵 등의 질병을 얻은 김익달은 1936년 요양차 귀국하여 황해도 해주에 머물렀고, 해주병원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곳에서 낙동강가에서 성장한 고향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낙동서관(洛東書舘)이라는 이름의 서점을 운영하였다. 이후 1941년 아내인 하성련(河聖蓮)과 결혼하였다. 1944년 징용을 피하여 험준한 산골인 황해도 수안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해방 이후[편집]

1945년 광복을 맞은 김익달은 수안 생활을 청산하고 해주를 거쳐 고향길을 재촉하였다. 동년 9월 22일, 출판사 낙동서관을 창설하여 출판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영어회화집', '가요곡집' 등 보다 대중적인 출판을 하였다. 1947년 낙동서관은 서울시 중구 을지로4가 187로 이전하였고, '낙동강 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대양출판사(大洋出版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8년 대양출판사의 사옥을 서울시 중구 양동 87 (현재의 남대문로5가)로 이전하고, '이야기 동산' 등의 아동문고를 발행하였다. 전국 주요 중학교 입시 문제를 망라·해설한 최초의 수험 준비서인 '지능고사'를 발행하였는데, 전국에서 13만 부가 매진되는 대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1949년 중학생 참고서인 '간추린 참고서'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밖에도 '국·한·영 실용사전', '표준 영문법', '1·2년생의 영문법'등의 학습 부교재 및 사전류를 출간하였다.

한국 전쟁[편집]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김익달은 예금을 모두 찾아 사원들에게 조건없이 나누어 주었고, 거래처 사람들을 소집하여 공개적으로 제작비를 공평하게 지불해 줌으로써 받는 이들을 감격하게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한편, 피난지인 대구시 중구 삼덕동 29에서 출판을 계속하였다. 1951년 대전에 대형 책 도매상인 대양서림(大洋書林)을 열어, 부산·대구 등 영남 지방에만 국한되어 보급되고 있던 책을 충남·충북·호남 지역 독자들에게까지 공급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 1일, 피난지 대구에서 잡지 '학원(學園)'의 창간 11월호가 발행되었다. 김익달은 창간사에서 '우리들의 장래가 학생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을 위한 이렇다 할 잡지 하나 없는 것이 오늘의 기막힌 실정'이라고 밝히면서 당시 삭막했던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불행했던 이 나라의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자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한다는 강한 발행 의지를 보였다. 또한 잡지 학원의 창간과 함께 대양출판사는 학원사(學園社)로 개칭하고, 학원장학회(學園奬學會)를 설립하여 1953년 2월 22일 1회 장학생 12명을 선발하였다. 학원장학회는 성적이 특히 우수하고 높은 덕성을 아울러 갖춘 모범생으로서 가정이 극빈하여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에 놓여 있는 학생을 중학교 2학년 중에서 선발하여 대학 졸업시까지 8년~10년 동안의 납부금 전액을 지급하였다.

1950년대[편집]

1953년 10월 서울 중구 양동의 사옥을 수복하고 '학원명작선집'을 발행하였다. 1954년 1월 제 1회 학원문학상이 발표되었다. 이는 다달이 시행하는 '학원문단작품 모집'과는 별도로 진행되어, 연 1회씩 모집하여 새해 초에 발표하는 보다 큰 축제였다. 1969년 1월 '학원'이 학원사를 떠날 때까지 11회 행하여졌다.

묘소[편집]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345에 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