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최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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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정의[편집]

육상경기 [陸上競技, athletics]

육상경기는 영어로 athletics가 기원이지만, 현재는 track and field가 일반적으로 쓰인다.

원형은 인류의 발생과 동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달리기[走] ·뛰기[跳] ·던지기[投]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방어법 ·공격법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로 스포츠화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으나 그 사이, 신(神)에 대한 의식의 일부로서의 역할을 하던 시대가 오래 계속되었다. BC 10세기의 그리스 시대가 되자, 신의 제전과 스포츠적 행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영웅은 신 또는 신으로 칭송되는 무장으로, 동시에 뛰어난 경기자였기 때문에 스포츠는 이 영웅들의 장송의식(葬送儀式)의 하나였으며, 신의 제전의 일부였다.

종목은 달리기 ·창던지기 ·철구(鐵球)던지기 등으로서, 달리기경주는 원형의 넓은 곳에서 겨루었고 순위만으로 기록은 없었다. 상품은 여성 ·순금막대기 ·소 ·말 ·돼지 등이었다. 스포츠로서 처음으로 기록에 남은 경기회는 고대올림픽으로, BC 776년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제1회를 개최, AD 393년까지 4년마다 정확히 거행되었고 293회를 거듭했다.

기원 전 제17회까지는 직선을 달리는 드로모스라는 육상경기만 거행되었지만, 제18회부터 5종경기(넓이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단거리경주 ·레슬링)가 추가되었다. 여자경기는 스파르타에서만 거행되었지만, 스파르타의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고대올림픽은 그 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점차로 타락, 394년 마침내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처럼 육상경기는 곧 올림픽으로서 그 운명도 함께 했다. 그 후 중세봉건시대에는 기사의 단련법으로서 무술은 요구되었지만 육상경기의 장려는 없었고, 1896년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근대올림픽이 부활되고 비로소 새로운 활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12년 국제육상경기연맹(International Amateur Athletic Federation:IAAF)이 탄생했고 21년에는 세계기록을 IAAF가 공인하는 제도도 생겼다.

또한, 기술혁신으로 기구 ·시설 ·종목 등에 대폭적인 변경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장대높이뛰기의 폴은 나무 → 대나무 → 스틸로 변한 후, 현재는 활처럼 휘어지는 탄력성을 가진 글라스파이버제(製) 폴이 출현했다. 그라운드의 주로(트랙)도 코크스 모양의 신더에서 시작하여, 화학합성고무를 원료로 한 전천후트랙(타탄)이 사용되는 등 이 때문에 세계기록이 대폭적으로 경신되었다. 1964년에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전기 계시기도 등장했고, 또한 여성의 체력향상에 따라 한동안 금지되었던 여자 800m가 도쿄 올림픽에서 부활되었으며, 1972년의 뮌헨 올림픽에서는 여자 1,500m까지 새로운 종목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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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의 역사[편집]

인류가 어떤 경과를 거쳐 스포츠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기본적인 운동양식이 언제쯤 경기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는가에 관한 고찰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본적인 운동 양식은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고, 자연스레 손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경기는 신전 앞에서 행하는 의식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기원전 776년에 올림피아 지방에서 발전했던 올림피아스(Olympias)」라는 경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이미 여기에는 직선 단거리 경주의 일종인 「스타디엄주」, 장거리 경기인 「도리코스주」, 「고대 오종경기」 및 「원반던지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1000년간 융성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기원393년 그리스도 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이후 올림피아 성역이 붕괴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이나 농민들 사이에서 스포츠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았으며, 대부분의 민중들은 위정자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의지의 표현 수단으로서 경기를 계속 이어갔다.


근대육상, 영국에서 발전 시작

17세기에 이르러 육상경기는 대부분 상금을 걸고 진행되었으며, 상금을 타기 위한 수단으로 각지의 우수 선수들을 고용하려 애쓰는 귀족들에 의해 규모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보였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된 신문은 각종 경기의 기록, 경기 예고 및 예상기사를 실어 대중에게 경기의 재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각종 레이스 경기는 별도의 시설없이 공공도로를 사용한 장거리 레이스로 각지에서 행해졌으나, 이후 경기 전체 내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정해진 경기장을 주회(走回)하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장거리뿐 아니라 1마일, 1/4마일, 100야드 등 비교적 짧은 거리의 레이스도 발전하게 되었다.


1830년 아마추어 경기 등장

1830년에 들어서면 주목해야 할 레이스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영국 버밍검 대학생이 프로와 같은 경기용 가명(假名)을 내걸고 프로와 같은 외관을 갖추고 1마일 크로스컨트리 장애물 레이스를 달린 것이다. 이것은 상금을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자신의 학교가 아닌 공공도로를 달렸다는 점에서 새로운 아마추어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1840년대에 육상경기의 무대는 대학으로 옮겨진다. 이 당시 더블린 대학에서는 아일랜드 고유의 민속경기를 경기에 포함시켜 진행했는데 이 경기는 오늘날 필드 종목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레이스의 발달과 더불어 기숙사 대항 경기, 교내대회 등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경비나 장소의 지원 등 학교 차원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신흥 브루조아 자녀의 대학 입학이 증가함에 따라 육상경기를 과외활동의 일환으로써 여기는 풍토가 자리잡은 점도 특기할 만 하다. 1864년 3월 졸업생들의 끈끈한 유대와 대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대학간의 제1회 「정기 육상경기 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육상경기는 점점 조직화의 양상을 띠어 1866년 3월에는 「아마추어 육상경기클럽(AAC:Amateur Athletic Club)」을 결성, 12종목의 경기를 개최하여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으나, 점점 승자가 정해져 있는 프로경기에 시들해진 사람들은 아마추어 경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프로와 아마추어가 공존하는 「오픈 경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이즈음에 가속화된 공업화·도시화는 지방 중소도시의 발전을 불러와, 런던뿐 아니라 맨체스터,리버풀 등 지방도시에서도 육상경기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전국으로 고르게 퍼진 육상열기는 결국 「전영국 선수권대회」개최라는 결실을 이루게 되었다. 회원의 대부분이 일류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구성된 AAC와 시민계급으로 구성된 「런던 육상경기 클럽(LAC:London Athletic Club)」이라는 두개 단체의 대결 구도를 거쳐 「아마추어 육상경기협회(AAA:Amateur Athletic Association)」가 결성되고, 까다로운 출전자격과 16개조의 경기룰을 정하여 개최된 이 대회를 통해 영국은 육상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지만 이어 미국의 추격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미국이 리드하는 20세기 육상

20세기 육상을 리드하고 있는 미국의 육상경기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선수들에 의해 태동되었으며, 그 종목도 단순히 육상경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체조 등 체력 양성에 효과적인 다른 스포츠와 병행하며 발전을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육상경기 클럽은 「샌프란시스코 올림픽클럽」으로, 아마추어가 관리한 경기 클럽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68년에 이르러「전미 아마추어 육상경기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최초의 실외 경기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대학의 육상경기는 풋볼 등에 비해 다소 늦게 발족되었다. 1873년 하버드, 예일, 코넬, 콜럼비아 등 4개 대학 대항 육상경기가 개최되어 100야드 달리기, 120야드 허들, 1마일 달리기, 3마일 달리기, 7마일 경보 등의 종목을 통해 실력을 겨루었으며, 이후에 14개 대학이 모여 「전미 학생아마추어 육상경기협회」를 조직함으로써 본격적인 학생 육상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20년이라는 단기간에 영국을 앞질렀으며 기록이나 전적면에서 세계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미국은 「전미 아마추어경기연합(AAU:Amateur Athletic Union of United States)」을 설립하고 영국의 각종 경기 협회와 대서양을 넘나드는 대학간 교류를 시작했다. 20세기를 목전에 둔 이 시기에 양국이 서로 원정하면서 육상경기의 대항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그후 「근대 올림픽」이 해가 지날수록 규모를 확대하고 내용의 충실을 다져가며 더욱 성대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 주 종목인 육상경기가 세계적으로 보급되는 추진력이 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94년 프랑스의 P. 쿠베르탱 남작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를 발족시켰으며, 육상경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직한 수많은 경기클럽과, 전술한 각국 상호간의 교류 대항전으로 이루어진 스포츠의 국제화 기운에 힘입어, 1896년 제1회 올림픽 개최라는 대결실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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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종류[편집]

<단거리>

100M ,200M ,400M ,110MH,(여자는 100MH), 400MH ,400MR ,1600MR

<도약>

멀리뛰기 ,높이뛰기 ,세단뛰기 ,장대높이뛰기 ,10종경기(여자는7종경기)

<투척>

투포환던지기 ,원반던지기 ,투창던지기 ,해머던지기 ,

<중,장거리>

800M ,1500M ,3000M장애물 ,5000M ,10000M ,3천경보 ,5천경보 ,20KM경보

하프(10KM).마라톤(4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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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을 빛낸 사람들[편집]

메달 기록
에티오피아의 기 에티오피아
남자 육상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 1932년 8월 7일1973년 10월 25일)은 에티오피아 (출생 당시 에티오피아 제국)의 육상 선수이다. 두 차례에 걸쳐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에티오피아의 모우트(Mout)에서 태어났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를 모시는 친위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한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뛰며 마라톤에서 2시간 15분 16.2초의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 에티오피아에서 영웅이 되었다. 아프리카 흑인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 6주 전에는 충수(맹장) 제거 수술을 받아 훈련을 단축시켜야 했으나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마라톤에 참가, 다시 2시간 12 11.2의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했으나 일본에선 아베베가 우승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국가(國歌)를 준비하지 않아 기미가요가 울려퍼졌다. 이 대회 후에 중위로 진급되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는 높은 고도와 부상,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17 킬로미터만에 기권하였다. 1969년에는 아디스아바바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해 사격과 양궁에서 금메달리스트를 수상했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아디스아바바에서 또 한번의 교통사고로 4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6만 5000명이 방문했다.



메달 기록
최성애
자메이카의 기 자메이카
남자 육상

우사인 볼트(Usain Bolt /juːˈseɪn bəʊlt/ 유세인 볼트[*], 1986년 8월 21일 ~ )는 자메이카의 육상 단거리 선수로, 남자 100m 세계 기록과 남자 200m 세계 기록, 그리고 남자 400m 계주 세계 기록 보유자이다.

2008년 5월 31일, 미국 뉴욕 아이칸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리복그랑프리 100m에서 9초 72 (+1.7 m/s)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아사파 포웰이 가지고 있던 종전 기록 9초 74를 0.02초 차이로 앞당겼으며, 2008년 8월 16일, 베이징 올림픽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 69 (+0.0 m/s)의 기록으로 또다시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다. 경기 도중 신발 끈도 풀어지고 결승선 10여m를 앞두고 전력질주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기록을 세워 놀라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2008년 8월 20일에는 남자 200m 결승에서 기존 마이클 존슨의 세계기록 19.32를 0.02초 앞당긴 19.30 (-0.9 m/s)으로 골인하면서 남자 200m에서마저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2009년 8월 16일(현지시각)에는 제 12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 58 (+0.9 m/s)로 우승하며 또다시 자신의 세계 신기록을 갱신했다. 이는 베이징 올림픽때로부터 정확히 1년만에 이루어진 결과다.



메달 기록
최성애
러시아의 기 러시아
여자 육상

옐레나 가지예브나 이신바예바(Елена Гаджиевна Исинбаева, 1982년 6월 3일 - )는 러시아장대높이뛰기 선수이다.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2004년 올림픽에서 4.91m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으며, 2005년 6월 22일에는 여자 장대높이뛰기에서 5m 벽을 돌파했다.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국제육상연맹 선정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2008년 8월 18일, 베이징 올림픽 여자 장대높이뛰기 결승에서 5.05m로 24번째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편 2009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는 세 번의 기회를 모두 실패하여 기록을 내지 못하는 부진함을 보였으나, 2009년 8월 28일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벨트클라세 골든리그 대회에서 5.06m를 뛰어넘어 자신의 종전 세계 기록을 1cm 갱신하며 다시 세계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출처>

  1. 두산백과사전
  2. 인터넷 : http://kongja.com.ne.kr/trfirum/frame1.htm
  3. 네이버 검색 http://www.naver.com
  4.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