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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박해[편집]

병오박해란 1846년 헌종 12년 병오년에 일어난 박해이다. 김대건 신부를 처형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행적[편집]

청년 김대건을 선택한 프랑스 교회는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었다. 아편전쟁 당시 조선·중국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프랑스 군함들이 동아시아에 파견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 과정을 마친 김대건은 바로 그 프랑스 군함을 타고 1842년 양자강에 도착하였다.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명령받은 김대건은 프랑스 해군 군함을 타고 중국에 입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건은 역할 중 하나는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는 도우미 역할이었다. 1844년에 그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 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또 동년 10월 그는 페레올 신부를 모시고 배편으로 충청도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이때 그는 페레올 신부를 한양까지 안내했다. 2년 뒤인 1846년에는 만주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 등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해안 루트를 모색한 바 있다. 김대건 신부는 이 활동을 하던 중에 서해안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해 10월 한성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실제 임무가 조선에서 포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 선교사의 한국 잠입을 안내하는 역할도 있었다.


기독교의 행적[편집]

천주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거부로 조선왕조의 근본 질서에 반하였다. 순조 원년 1801년, 황서영은 조선왕조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백서를 적었다. 백서에 사용된 편지지는 길이 62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였으며,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먹으로 썼다. 백서에는 발송인 황심의 이름만이 씌어 있으며, 지은 날짜는 〈천주 강생 후 1801년). 달두 첨례 후 1일〉(음력 9월 22일 : 양력 1801년 10월 29일)이라고 적혀 있다. 백서의 내용 중 원문의 내용은 대략 3개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1.당대는 천주교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박해때의 순교자 약전


2.중국인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수형(受刑)


3.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근본 건의책


이 때 근본 건의책은 4개 항목으로 나뉜다.


1.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천주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의 요구.


2.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낼 것.


3.조선을 청나라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케 할 것.


4.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해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등이다.


이 백서를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를 보내려다가 의금부에 체포 되었다. 황사영은 순수한 신앙의 활동이였다고 변명하였으나 이 백서를 지은 황사영은 음력 9월 29일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끌려올라와 음력 11월 5일에 처형되었으며, 가산을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 처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 갔다. 먼저 잡힌 황심과 옥천희도 며칠 전에 각각 처형되었다. 백서는 관헌의 손에 넘어가 조정을 아연케 하고,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기독교는 조선을 뒤흔들기 위한 서양 세력이라고 생각하였고 기독교의 탄압은 한층 엄준하게 되었다.

사건의 결말[편집]

이 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감시는 한층 더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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