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배우는사람/문서:인도철학(Fundamentals of Indian Philosophy)/제1장 서론
사물의 본성에 대한 체계적 탐구로서의 철학은, 비서양권의 문화와 문명에는 현저하게 결여된, 오직 서양적 활동이라는 것이 서양에 널리 퍼진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나타내는 증거를 현대 미국의 유명한 두 철학자의 저작에서 인용해 보겠다.
고대민족은 거의 신화적 단계를 넘어 진보하지 못했고, 희랍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아무도 진정한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철학사의 서술을 희랍으로부터 시작된다. 희랍은 이후의 모든 서양철학이 성장할 기반을 마련해 놓았을 뿐 아니라 유럽문명이 이천년간 몰두했던 거의 모든 문제를 정형화시켰고, 또 거의 모든 답을 제시했다. 그들의 철학은, 인간의 사고가 단순한 신화적 출발로부터 복잡하고 포괄적인 체계로의 발전을 보여주는 최선의 실례이다. 희랍사상가들을 고무시켰던 독립정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어떤 민족도 보다 더할 수도, 비견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1)
1) Frank Thilly, A History of Philosophy, Ledger Wood에 의한 개정신판 (New York: Henry Holt & Co. 1955) p.7.
모든 민족이 나름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고 인정할 때조차도 서양철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에서 배태되고 발전된 철학만이 참되고 진정한 철학이며, 다른 것은
시나 신화, 기껏해야 윤리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틸리와 우드에 따르면,
보편적 철학사는 모든 민족의 철학을 포함한다. 그러나, 모든 민족이 진정한 사고의 체계를 생산한 것은 아니며, 오직 소수의 사변만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수는 신화적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힌두, 이집트, 중국 등 동양민족들의 이론조차도 주로 신화적, 윤리적 교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완전한 사고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시와 신앙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양 여러 나라의 연구에 제한하여, 우리 자신의 문명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고대희랍의 철학에서부터 출발하겠다.2)
2) Ibid.p.3.
그렇다면, 버틀란드 러셀을 제외한 서양철학의 역사에 관한 모든 책에서,
서양철학 외에는 철학이 없다는 뜻으로 제한없이 ‘철학사’라는 제명이 붙여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서양철학도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이런 태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필자는 그러한 태도를, 한편으로는 남의 지적 전통에 대한 심한
무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뿌리깊은 지방주의에 기인한다고 본다.
서양철학도들이 비서양권의 철학을 그토록 거만하게 신화적, 종교적 사상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즉, 그들의 전통에서는 종교와 철학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고, 후자는 전자의 권위로부터 해방되고자 길고 치열한 투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대립이 없었던 문명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무비판적인 가정이다. 그런 그릇된 생각의 바탕에는 ‘철학’이니 ‘종교’, ‘종교적 의식’이라는 용어가 비서양권 민족에게도 서양인에 대해서와 똑같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무지하고 일방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 문화권에서처럼 종교와 철학이 언제나 불가분적 관계속에서 이어져 왔다는 것이 곧 서양철학보다도 덜 합리적이고 가치가 적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비서양적 철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의 또 다른 원천은, 철학의 자격을 가진 사상은 어떤 것이든 반드시 지난 3세기 동안 서양에서 이해되고 실천되어 온 과학을 다루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인도의 사상체계는 현대 서양과학으로부터 발생된 문제들을 취급하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철학이 전혀 아니고 신화나 종교라는 것이다. 요컨대 서양철학도들은, 정의 definition라는 엄명에 의해서 비서양적 사상을 철학의 영역으로부터 제거하여 신화나 종교, 시로 규정해 버렸다.
이상의 태도와 정반대로, 우리는 한 민족의 철학이 특정한 사고양식(형이상학적, 과학적, 윤리적, 사회 정치적, 예술적, 신화적, 혹은 종교적인)과 동일시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또한, 어느 특정 민족의 사상이 철학적인가 아닌가라는 것을 미리 정해진 기준, 특히 자신이 속한 전통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 어느 한 민족의 철학이란 그 문화의 정수이며, 그 사고, 느낌, 삶의 양식의 총체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각 민족의 철학이란, 그 환경과 그 민족의 인식적, 지적, 미학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경험에서 비롯된 특수한 양식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한 만큼 타민족의 철학을 자신의 문화적 척도와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은 전혀 타민족의 이해로 이르지 못하는 몰이해한 행위이다. 한 민족과 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민족이 어떻게 세계와 그 자신과 다른 민족을 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문화의 구성원들이 타민족의 철학을 개방된 마음으로 접근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는 한, 타민족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없고, 더불어 자기 자신의 철학과 문화의 계발과 풍성화도 기대할 수 없다.
비록 비교철학이 아직은 그리 발달되지 않은 학문이지만,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장벽을 부수기에는 충분한 직업이 이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지적 배타주의와 문화적 우월의식 때문에, 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다른 전통의 철학을 계속 경멸해 왔다. 그 결과 안일한 무지와, 무관심, 완고한 비관용, 상투적 표현, 진부성, 그리고 이기주의적 의식 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커다란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도와 유럽적 전통에서 제기된 철학의 기본적 문제들과, 또 제시된 해답의 대부분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이다.3) 유럽철학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모든 문제들은 또한 인도 철학자들을 지배했다. 일원론과 다원론, 변화와 영원, 현상과 실재, 유물론, 원자론, 실재론, 실용주의, 자아의 본성과 의식, 지각, 언어 그리고 실재, 의미와 명칭에 대한 이론, 보편과 특수의 문제, 유명론, 개념론, 바른 인식의 기준, 논리의 법칙, 추리론, 자유와 결정론, 개인과 사회, 가치 있는 삶, 이것들은 인도와 유럽철학에 공통된 문제들이다.
3) 인도와 유럽 철학 사이의 유사성에 관한 고무적인 논의를 위해, Th. Stcherbatsky의 Buddhist Logic 1권, pp.529-46, “서양철학과의 비교” Some European Parallels를 참조할 것. 인도철학에 있어서는 다양한 문제와 방법, 그리고 그 해결에 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를 서양의 전통과 대조 비교할 수 있는 책으로 Karl H. Potter의 Presuppositions of India's Philosophies (Englewood Cliffs, N. J: Prentice-Hall, 1963)가 있다.
나가르주나 Nagarjuna, 아르야데와 Aryadeva, 바수반두 Vasubandhu, 짠드라끼르띠
Candrakirti, 디그나가 Dignaga, 다르마끼르띠 Dharmakirti, 다르모따라 Dharmottara,
안남브하따 Annambhatta, 꾸마리라 브하따 Kumarila Bhatta, 쁘라브하까라 Prabhakara,
강게샤 Gangesa, 샹까라 Samkara 그리고 라마누자 Ramanuja의 철학적 예리성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들 사상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전혀 무지한
일부 사람들만이 ‘힌두들의 .... 이론조차도 ....주로 신화적이고 윤리적 교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따위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철학 philosophy에 대한 산스크리트 용어는 ‘다르샤나’ darsana 그리고 따뜨와 tattva인데, 이것은 각각 ‘진리와 실재에 대한 비젼’ 그리고 ‘실재의 본성’을 의미한다. 다른 전통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도 사상가들도 존재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다. 즉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의 참된 본성은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것인가? 만일 창조된 것이라면,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한갓 믿음이나 의견과는 구별되는 지식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오류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계의 궁극적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인간은 자유로운가, 아니면 그의 행위는 외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가? 만일 그가 현재 자유롭지 않다면, 그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가? 자유에의 길이 있는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그것을 어떻게 획득해야 하는가? 등등.
그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비록 이들 문제에 대한 인도인의 답변이 어떤 점에서 서양의 대답과 놀랍도록 유사하긴 하지만, 철학적 탐구에 대한 인도와 서양의 방법론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4)
4) Ibid.
인도철학자의 작업방식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상대방의 견해 purvapaksa
로서, 철학자는 그의 논적의 입장을 논증 argument과 더불어 제시해 준다. 두 번째는
논박 khandana으로서, 철학자는 논적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논증에 의해
반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자의 입장 uttarapaksa으로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논증과 더불어 제시한다. 이 마지막 단계는 또한 결론 siddhanta이라고도 한다.
인도철학은 그들의 강한 실제적 성향 때문에 실용적이다. 다시 말해, 인도 사상가에 따르면, 철학의 목적은 단지 지적 호기심의 민족이나 이론적 진리의 추구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철학이 삶의 양식과 질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5) 철학이 아무리 정교하고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일지라도, 만일 우리의 삶에 아무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적절하지 못한 궤변으로 간주된다.
5) Heinrich Zimmer, Philosophies of India(Princed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2장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과 “힘으로서의 철학”이라고 표제가 붙어 있다.), pp.48-50. 56-66.
철학적 관념론자의 성격과 삶은, 기본적으로 철학적 실재론자의 그것과 달라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신이 존재한다는 철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의 생활양식은
신 개념을 거부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의 것과 달라야 한다.
요점은 인도인들에겐, 철학적 지혜가 지적 탐구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서 지적으로 분별되고 확립된 진리를 자신의 인격 속에 동화시키고, 자유와 각성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도사회에 있어서 철학자란 단지 지적 덕을 가진 사람일 뿐 아니라, 지식과 평화, 자유와 지혜의 살아있는 표본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으로 철학자는 인도문화속에서 존중되어 왔다. 한 철학자는 그의 정교한 변증적 능력이나 방대한 이론적 지식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 반영된 지혜 때문에 존중되는 것이다.6) 아무리 그의 지식과 학문이 위대할지라도 이기심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귀한 심성, 평온한 마음, 보편적인 견해라는 적극적 덕성을 갖지 못하는 한, 인도문화 속에선 철학자도 존숭되지 못한다. 요컨대, 철인의 생활양식은 대중들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인도철학자가 이 개념에 들어맞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일반적으로 철학자에 대한 인도적 개념에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일 따름이다.
6) “인격과 품행을 가르침과 동일시하는 이러한 인도인의 사고는, 내 힌두인 친구가 동양철학에 관한 어떤 저서를 비판하는 말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결국 진정한 성취는 자기 자신의 삶속에서 확신을 찾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한 사람의 저술의 가치는 그의 삶 자체가 얼마만큼 자신의 가르침의 실례가 되는가에 의존한다.” Ibid. p.50.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전통 속에서도 철학자에 대한 유사한 이미지가 발견된다.
그리고 불교철학자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또 그것을 논증에 의해 옹호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거나 혹은 그들을 조롱해선 안된다.
불교철학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도철학은 서양철학과 달리, 모순률이나
배중률을 절대적으로 타당하고 완벽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철학자는 흔히 논쟁에서 명확하게 긍정이나 부정적 단정을 내리지 않는 수가
있다. 이런 태도는 서양사상가에겐 매우 당혹스런 것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더
퀘슬러 Atthur Koestl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세기의 전형적인 지성인은 그의 생애에 한 번은 인간이라기보다 기관총에 더욱 가까운 듯하다. 따라서 그는 그가 만나는 동양인의 태도에 매우 당혹하게 되는데, 그것은 유럽철학자의 냉혹스러운 태도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동양인이 지닌 단정적인 긍 부정에 대한 혐오를 감지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라는 명령보다도 동양인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없다. 그들은 그런 태도를 말할 수 없이 거치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입씨름거리가 없어졌을 때 리슬리씨를 가장 실망시킨 것은 공격당하고도 거듭거듭 싸우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그는 직접적으로 비폭력 ahimsa을 배울 많은 기회를 갖긴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동양인의 ‘논리적 혼란’에 대한 경멸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7)
7) Edward Conze, Buddhist Thought In India(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7), p.214. Conze가 참조한 것은, 퀘슬러의 Arrow in th Blue(New York: The Macmillan CO., 1970), p.213과 The Lotus and the Robot(New York: Harper & Row, 1972), pp.219,225이다.
사고의 법칙을 절대적 지위로 높이는 서양의 특징에 대해, 비교철학과 종교의
분야에 저명한 학자인 버트 E. A. Bertt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양철학은 적대적인 논쟁을 매개로 하여 진보해 왔다---이것은 토론과 논쟁을 재미있고 야단스럽게 만들어준다. 무시무시한 두 권투 선수가 지적인 스파링에 몰두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철학적 간행물의 주위에 운집하여 흥분 가운데 그 난투극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의 진전에 있어서 지겹도록 느리고 소모적이며 호전적인 방식이다. 이것이 우리의 호전적 본능을 만족시켜줄지는 몰라도 냉철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걸리적거리는 갈등을 통해 서로 치고받음이 없이도 더 커다란 진리를 향해 성장할 수 있는 사상가들과 비교할 때 결정적인 경함이 있음을 자인해야만 한다.8)
8) E.A. Burtt, "What can Western Philosophy Leam from India?" Philosophy East and West, Vol.V.N.3(October 1955), pp.206-7.
이상에서 우리는 인도적 입장에서는 실재에 대한 철학자의 비젼이 그의 삶과
행위에 진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는 우리의 논점을 구체화하기 위해 장황한 인용을
하였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인도의 전통에서 인정된 인생의 네 가지 기본적 가치 putusartha,9) 즉 의무 dharma, 재물 artha, 쾌락 kama, 해탈 moksa의
실현에 나와 남을 인도하는 좌표가 될 수 없다.
9) (Purusarthas) 삶의 네 가지 목적과 네 가지 카스트(사제 brahmin와 통치자 ksatriya, 상경인 vaisya과 육체노동인 sudra), 삶의 네 단계(asramas: 범행기 brahmacarya, 가주기 garhastya, 임서기 vanaprastha, 고행기 sannyasa),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의무는 인도문학 전반에 걸쳐 다루어지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Bhagavadgita, Mahabharata, 마누법전 Laws of Manu, 그리고 Kautilya의 Arthasastra와 같은 인도 고전에서 광범하게 논의되고 있다. A Source Book in Indian Philosophy, ed. by. S. Radhakrishnan and Chales. A.Moore(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pp.101-223와 Zimmer의 Philosophies of India, pp.34-42. Potter의 Presuppositions of Indian Philosophy, pp.5-10를 참고.
dharma는 산스끄리뜨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갖기 때문에, 영어로 정확히 번역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탱하다’, ‘유지하다’를 뜻하는 어근 dhr로부터
파생되었음에 주목하여, 그 기본적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dharma란
개인과 사회의 보호와 유지에 필수적인 의무, 정의, 일반적으로 행위의 규칙과
행동지침을 뜻한다. 그리고 사회의 개인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속에서 조화롭게 살고 기능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다르마이다. 각 개인은
그들의 적성, 능력, 그리고 어떤 주어진 시간에 삶의 단계에 따라 다른 의무와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dharma와 같이 artha도 산스끄리뜨에선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어근의 의미는 ‘사람이 구하는 것’이다. 대체로 말해서 artha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번역될 수 있다. ‘아르타’가 직업이며 재물, 그리고 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모든 다른 물질적 수단을 포괄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아르타가 인간의 정신적 삶을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정신적 삶에 필수적 조건으로서의 물질적 안정을 말한다. 찢어지는 가난과 치명적인 병마에 찌들리면서 정신적 삶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계 수단은 아르타이다.
그러나 재물은 다만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다. 재물은 까마 kama, 즉, 음식, 섹스, 가정, 우정과 같은 쾌락, 일반적으로 향락을 위한 것이다. 인생의 주요 목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중요한 것은, 아르타와 까마 상호간에 그리고 다르마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네 번째 목적은, 목샤 moksa이다. ‘moksa’라는 용어는 ‘해방되다’, ‘벗어나다’, ‘해탈하다’를 뜻하는 어근 muc로부터 파생되었다. 요컨데 목샤란 완전한 자유를 뜻한다. 그런데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인도 지혜의 핵심이다. 인도철학이 목샤를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여긴다는 사실이 바로 그들이 인간의 본질적 영성에 특별한 의의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모든 인도철학 학파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과 속박 상태는 어떤 원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본성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무지 avidya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빠니샤드는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 무한, 영원, 그리고 불멸의 아뜨만 Atman(=Brahman)이며, 궁극적 실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무지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육체나 마음, 에고 Ego와 같은 유한하고 무상한 것과 동일시하고, 그리하여 그것들에 집착하고, 마침내 상실하게 될 때가 오면 괴로워하고 비탄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지와 속박을 정복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은 그 참다운 존재에 있어서 자신이 바로 브라흐만이라는 인식을 획득함에 의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란 자아실현, 즉 인간이 바로 무한 영원, 불사의 순수존재라는 지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불사’ immortality란 시공 속에서의 끝없는 연장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포괄적인 영원한 실재와 동일하다는 발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깨달음에서 생사란 다만 현상계에 속하며 궁극적 실재를 갖지 않는, 무지의 소산에 지나지 않음이 이해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도철학의 모든 학파들이 목샤를 사후에 예기되는 상태가 아니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아직 육체를 갖고 살아 있는 동안, 여기 그리고 지금 달성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인도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육체가 죄악과 타락의 원천으로서 경멸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차라리 목샤의 달성을 위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육체가 없이 해탈, 혹은 다른 어떤 지식을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모든 철학 학파들이 왜 육체적, 심적 수련으로서의 여러 가지 요가를 목샤의 달성에 필수적이라고 보는지 이제는 분명해졌다. 달리 표현하면, 생물학적, 사회적 충족은 목샤의 달성에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인도철학의 체계는, 힌두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문헌인 베다 Veda의 권위를 받아들이는가, 거부하는가에 따라서 정통파 astika와 비정통파 nastika로 구분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떤 체계가 정통파라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유신론적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파이면서도 무신론적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유신론과 무신론이 모두 베다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캬 Samkhya, 요가 Yoga, 니야야 Nyaya, 와이셰시까 Vaisesika, 미맘사 Mimamsa, 그리고 베단따 Vedanta는 일반적으로 정통파로 간주된다. 비정통파는 짜르와까 Carvaka(인도유물론), 쟈이나 Jaina, 불교 Buddha이다. 그러나 상캬, 요가, 니야야, 와이셰시카 학파는 베다를 수용도 거부도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기원되었기 때문에 정통파도 비정통파도 아니다. 또한 그 원형에 있어서 상카와 요가는 무신론적이고, 니야야와 와이셰시까는 유신론적이다. 그러나 전자도 후대에 와선 유신론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여섯 학파들은 일반적으로 정통학파로서 분류되고 있다.
또 다른 관점으로부터 일부 학자들은 정통적 학파들을 요가-상카, 니야야-와이셰시까, 미맘사-베단따의 세 짝으로 결합시키기도 한다. 그 근거는 세 짝에서 앞의 것은 실천에, 그리고 뒤의 것은 이론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가는 본질적으로 상캬의 이론적 체계에서 가르친 진리의 실현을 위한 신체적, 심적 수련의 실천적 학파이다. 마찬가지로 니야야가 일차적으로 방법론이면 와이셰시까는 그러한 방법에 의해 탐구된 형이상학적 체계이다. 미맘사와 베단따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유물론적 학파를 제외한 모든 인도철학의 학파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1) 모든 학파들은, 이성 reason과 경험 experience에 합당하지 않는 한 실재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성’이란 형식적 추리의 규칙뿐 아니라 귀납적 탐구의 규칙도 뜻한다. 마찬가지로 ‘경험’도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일상의 상식적 경험과 과학적 경험, 그리고 비일상적인 의식상태도 포함한다. (2) 모든 만족스런 철학은 사람들이 삶의 네 가지 목적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요컨대 모든 인도철학은 삶의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일만한 모든 철학은 단지 지적 훈련이 아니라 인간이 자각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응용되어야 한다. 삶의 질과 양식에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 철학은, 호기심의 갈증을 달래줄지는 몰라도 삶에 직접 관련이 없는 공허한 지적 구성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면, 철학은 방편적 soteriological 힘, 즉 인간의 삶을 무지와 어둠, 그리고 속박으로부터 지식과 지혜, 그리고 자유에로 변형시킬 힘을 가져야만 한다. (3) 인도의 모든 철학 체계는 인간의 본질적인 영성을 인정하여, 해탈을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 목적으로 보며, 철학이 인간에게 자유를 실현시키는 길을 보여주기를 요구한다. (4) 모든 학파는 인간의 고통이 원죄가 아니라 근원적 무지에 기인한다고 가르친다. (5) 따라서 자유와 해탈은 지식을 통한 무지의 정복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6) 모든 학파는 인간의 완전성에 한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겐 무한한 완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모든 존재의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빠니샤드가 가르치는 바로는, 인간의 내면의 자아가 곧 브라흐만이며, 불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7) 인도의 모든 철학학파는 완전한 자유 moksa, nirvana란 육신을 갖고 있는 동안, 지금 여기에서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8) 모든 체계는 이러저러한 형태의 요가를 해탈의 성취에 필요한 수행방법으로 받아들인다. (9) 모든 철학들은 까르마 karma와 윤회설을 통해서 보편적인 도덕적 질서(이것은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경험에 속한다)가 있음을 인정한다. (10) 모든 학파는 인간이 물질적 실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어리석은 것으로서 단호히 거부한다. (11) 모든 철학체계는 궁극적 실재가 감각과 이지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 비지각적, 비개념적, 직관적, 신비적 통찰로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2) 모든 학파들은 염세적이며, 무지와 고통, 비애와 속박으로서의 인간의 실존에 주의를 돌림으로써 철학을 시작한다. (13) 그러나 모든 학파는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이며, 지식과 지혜, 평화와 자유를 달성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내에 있음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한다. 요컨대 인도의 모든 철학파들은 허무주의뿐 아니라 부조리와 불안, 무의 철학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인간정신의 궁극적 승리를 분명하게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