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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토론:123.11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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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8년 전 (123.111.182.4님) - 주제: 문서 이동 방법 안내

원균 아들에 대한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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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아들에 대해서 출처를 요청하셔서 출처를 달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윤두수와 원균의 인척관계에 관해서는 인척이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 또한 포함하는 개념이니 성씨가 다르다고 인척이 아닐거라고 배제하기는 힘들거라 여겨집니다. 예를들어 아내의 고모부라면 성씨는 달라도 인척관계는 성립하니까요 실록에 그냥 단순히 인척이라고만 언급한거라고 보면 정말 사돈의 팔촌정도의 먼관계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인척관계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간에 임금의 앞에서 자신의 인척이라고 한걸로 보아 원균과 윤두수는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을거라고 여겨집니다. Ronain (토론) 2014년 5월 22일 (목) 16:10 (KST)답변

(1) 원균 배우자의 배우자는 “윤씨”가 없습니다. 원균 배우자가 “윤씨”였지만, 그렇다고 그 배우자의 배우자가 “윤씨”이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내용이 없지요. 그냥 “말”일 뿐입니다. 더구나 윤두수 형제가 원균을 친족이라고 한 까닭은 원균의 마누라가 “윤씨”였기 때문입니다. 출처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없네요.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2일 (목) 20:17 (KST)답변
(2) Ronain 님이 달아주신 출처대로라면, 원사웅이 1646년에 죽었는데, 1642년에 죽은 그 친모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에 대해 서술이 필요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2일 (목) 20:33 (KST)답변
(3) 승정원일기이든, 공신회맹록이든, 그 신빙성이 낮은 자료입니다. 승정원일기는 17세기까지의 기록이 훼손되어 겨우 1/3 정도만 건졌는데, 그마저도 첨삭되어 있다고 합니다. 공신회맹록은 인조의 정권유지를 위한 책이라고 보는 게 낫습니다. 물론 원균 문서에 나오는 그 행장에 비한다면, 아주 정확도가 높습니다. 기왕이면 승정원일기와 공신회맹록의 내용도 좀 수록해 주셨으면 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2일 (목) 20:40 (KST)답변
(4) 사돈의 친척 정도 된다면, 윤두수가 단순히 인척이라고 거론하기 힘듭니다. 윤두수 쪽에서 인척이라고 해 줄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윤두수 가문에서 보면, 왕실이 인척입니다. 다시 말해, 왕이 자신의 인척인데, 다른 인척을 굳이 거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2일 (목) 20:40 (KST)답변
(1) 성씨가 달라도 인척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윤씨이니 사돈관계로 짐작한다는 서술이 있다면 그냥 그 서술을 삭제하고 단순히 인척관계다라고 서술하면 되겠지요
(2) 이에 대해서는 별 할말이 없습니다.
(3) 원균항목에 원전그대로 서술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인가요? 그러면 원사웅의 사망설에 대해서 논의해야 하는데 그러면 문서의 통일성이나 가독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냥 원사웅항목으로 링크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4) 말씀하시는 의미를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C%9B%90%EA%B7%A0 실록에 보면 윤두수가 스스로 저와 원균은 친족관계라고 말합니다. 왕과 인척인데 굳이 다른 인척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른 반례가 있으면(ex 원균의 친척관계를 전부 확인해도 파평윤씨는 보이지 않는다) 모를까 자신스스로 친족관계다라고 시인한 이상 이 서술을 삭제할 필요성은 없어보입니다. Ronain (토론) 2014년 5월 23일 (금) 00:55 (KST)답변
(2) 아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원씨집안 족보에 수록된 내용을 말하신 거신거네요 저도 원씨 집안 족보를 다 확인한게 아니라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 후대에 수정된 내용이 아닌지 추측됩니다. 원사웅 항목에도 있지만 당대에는 원사웅이 아들 딸을 낳고 사망했다고 서술하지만 갑자기 1920년대에 원사웅이 전사했다고 서술이 바뀝니다. 출처를 확인해보니 신문기사에서 원씨집안 종손을 인터뷰하고 그에 대한 내용을 수록한거네요 그냥 원씨집안에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고 정도로 서술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첨언하면 파평윤씨 관련내용은 제가 서술한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거를 제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냥 놔둔겁니다. 원칙대로라면 그냥 놔두는게 맞고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모순되는 내용이 너무 많으니 그냥 삭제하는게 어떨까 합니다.Ronain (토론) 2014년 5월 23일 (금) 01:04 (KST)답변
(1) 및 (4) 윤두수는 명문거족이고 왕실의 외척이지만, 원균은 무관 가운데 대족이라도 윤두수에 비하면 한두 단계 뒤떨어지는 가문입니다. 윤두수 측에서 굳이 먼저 나서서 “나의 인척”이라고 추켜세울 만한 가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런 이유로 실록의 내용임에도 윤두수의 발언은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평 윤씨해평 윤씨 사이에서 혼동이 있어 착각한 것으로 보는 학자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록 이외의, 실제로 윤두수 가문과 원균 가문이 인척이라는 제3의 출처가 필요하게 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4일 (토) 18:15 (KST)답변
(2) 및 (4) 이 항목은 모순서술에 관한 부분입니다. 모순서술이 생기면 글 전체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꼭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4일 (토) 18:15 (KST)답변
(3) 원균 항목은 물론이고, 원사웅 항목에도 그에 대한 정확한 서술은 없습니다. 그저 “- 1646.9.3 20공신회맹록, 영국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元均) 장손(長孫) 전력부위(展力副尉) 행충좌위부사용(行忠佐衛副司勇) 신(臣) 원필(元珌)”라는 게 1646년 기록인데, 이 기록만으로는 원사웅이 이때 사망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 1628.9.13 19공신회맹록, 소무, 영사 2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元均) 장자(長子) 가선대부(嘉善大夫) 원성군(原城君) 신(臣) 원사웅(元士雄)”라는 기록은 원사웅이 1628년 생존한 기록 또는 그때 벼슬을 추증 받았다는 기록(이렇게 되면 생존 기록도 되지 못합니다)이지, 1646년 사망했다는 기록은 아닙니다. 즉, 원사웅의 사망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없습니다. 그것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4일 (토) 18:15 (KST)답변
  • 참고 - “그러나 이 묘는 가짜로 원균사망당시는 담배가 도입되지 않은 시기니 위에 나온 일화는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부분도 있는데, (Ronain 님이 쓴 내용은 아닙니다만) 이 부분을 꼭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담배는 당시 없었지만, 그렇다고 담뱃대가 당시 없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즉, 요즘에야 “담뱃대”라고 부르지만, 곰방대라는 담뱃대는 당나라 때도 있었습니다(곰방대는 원래 꼭 담배를 피우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연초”를 피우기 위한 물건입니다. 연초에는 아편이나 대마와 같은 마약류도 있고, 쑥이나 향초 등도 있습니다. 담배도 연초 가운데 하나이고요). 즉, 시기에 따라 “담뱃대”로 불렸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해당 물건이 반드시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은 현대를 기준으로, 또는 그 “물건”이나 “사실” 아닌 “이름”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예기치 못한 오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4일 (토) 18:34 (KST)답변

(1)(4) 그 부분에서는 저하고는 의견이 약간 다르네요 저는 그 부분을 윤두수가 원균의 덕을 보는게 아니라 원균이 윤두수의 덕을 보는 걸로 해석했는데요 실록의 그 당시 상황은 원균과 이순신에 대해 평가하면서 윤두수가 이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입니다. 원균에 대해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왈가왈부하는 자리에서 원균의 친척임을 내세워 자신을 높인다고 해석하는 것은 실록에 언급된 상황과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윤두수가 자신과의 친척임을 내새워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원균과 윤두수가 친척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윤두수 자신이 스스로 원균과 친적이라 할만큼 원균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원래 문서에도 원균과 윤두수가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서술할 거였고요 그러면 의견정리를 위해 물어보겠습니다. 제 의견과는 별개로 이 부분을 어떤식으로 서술하는게 맞다고 보시나요?

(3) 그 부분은 제 실수가 맞습니다. 1646년에야 그의 죽음이 확인된다고 정도로 서술하는게 맞겠네요 다만 원사웅이 전사했다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원사웅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서술한 사료는 다음 3개입니다. 1.공신회맹록: 1628년에 벼슬을 내렸다고 서술함 //님께서는 여기서 추증의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 뒤의 1646년의 언급과 모순이 일어나게 됩니다. 1646년에는 원사웅이 죽었으니 그의 아들 원필에게 공신자리를 주자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모순됩니다. 1628년에 이미 죽음이 확인되었다면 이때부터 원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지 18년이 지난 1646년에야 승계를 논의할거 같지는 않습니다. 2.승정원일기: 1628년에 가의대부로 승진한 기록이 있음 3.원균집안 족보 1720년판: 임란후 벼슬을 하고 아들 딸을 낳은 기록이 있음

이에 반해 원사웅이 전사했다고 서술한 사료는 제가 아직까지 하나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1920년대에 수정한 원씨집안 족보입니다. 그것도 원래는 살아있다고 서술하다 바꾼 경우지요 더불어 사료를 찾아보니 정경부인 윤씨의 이장에 관한 기록은 충훈부등록에 언급되어 있네요 1641년에 윤씨가 자녀가 없어 유리걸식을 하고 있으니 임금의 은혜를 바란다고 써있네요 당시 나이가 95세이니 당시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자녀가 이미 사망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다시 문제되는 것은 자녀는 사망했어도 원필이라는 후사가 있다는 점입니다. 1646년에 공신회맹록에서 승계를 논의한걸 보면 이때까지는 충분히 살아있다고 봐야 맞을겁니다. 이에 대한 의견 바랍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하자면 원사웅 곤장부분의 츨처는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권율 문서의 토론란을 보면 http://www.kbsmedia.net/zmall/goods/Zmall_detail.asp?goodsIdx=697 여기가 출처라고 주장하며 원사웅의 곤장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건 저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출처입니다. 그냥 그렇게 주장하니 그렇게 실어놓을 수 잒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원활한 토론을 위해 다음 접속시기를 대략적이라도 알려주세요 Ronain (토론) 2014년 5월 24일 (토) 23:40 (KST)답변

(1)(4) 윤두수와 원균이 인척관계이냐는 사안에 대해서는, “실록에 따르면, 윤두수가 원균의 인척이라고 말했으나, 실록을 제외한 다른 사료에서 인척관계를 증명할 증빙을 찾을 수 없다.” 정도로 정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진짜로 증빙이 있다면, 이순신빠들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5일 (일) 22:19 (KST)답변
(3) 원사웅의 전사 및 곤장 맞는 부분은 저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1646년 공신회맹록에서 승계를 논의했고, “승계 논의는 본인의 사망 등의 경우에 한다”는 사실을 남기면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방금 검색해 보니 오마이뉴스에 관련기사가 있습니다만, 오마이뉴스의 역사 관련 기사는 부정확한 경우가 많아서... 좀 그러네요. 한편, 공신회맹록에 등록되었다고 해서 봉록을 더 받거나 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인조 때의 공신인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만큼 공신에 대한 대우가 열악했는데, 전대도 아니고, 전전대의 공신에게 봉록을 지급되었으리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5일 (일) 22:19 (KST)답변
제가 로그인하지 않는 이유는, 이 주소( 123.111.182.4 )가 PC방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사용자토론:Knight2000 토론란에 글 남겨 주시면 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5일 (일) 22:19 (KST)답변
  • 참고 1 - 김완의 해소실기는 전라좌수영도 공격을 당해 군량을 빼앗겼다고 하고 있는데, 당시 이순신의 관할이 전라좌수영이었습니다.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료라고 봐야 합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5일 (일) 22:19 (KST)답변
  • 참고 2 -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는 전술적 승리, 전략적 패배입니다. 일단 포로를 구출했으니 전략적전술적으로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기병을 모두 잃어버리고 보군도 상당히 잃어서 녹둔도에서 방어진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진채를 뒤로 물려야 했습니다. 이는 영토를 잃게 된 상황이라서 전략적 패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모든 게 “성웅 이순신”이기 때문에 전술적·전략적 승리라고 하는 게 한국의 사학계·군사학계입니다. 그만큼 이순신이 관련되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토의가 되지를 않습니다. 원균에 대한 사후의 서술이 부정적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는 그러한 면도 작용했으리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이순신의 반대자로서 원균이 부각되어,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 고의적으로 원균을 깎아내린 면도 크다고 봐야 합니다. 그에 대비하여, 임란 초기의 신립은 문경새재에서 퇴각하던 날(4월 24일) 이미 일본군은 문경새재에 도달한 뒤였습니다. 즉, 일부는 상주를 점령하고, 일부는 문경새재에 도달했는데, 신립은 경계에 실패하여 적전 도주를 해 버린 셈이지요. 그 뒤로도 경계에 성공하여 일본군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했음에도 신립은 무시하다가, 궁병으로 쓰라고 모아준 병력으로 기병돌격을 하다가 패배를 당합니다. 이는 명령거부(기마궁병으로 기병돌격한 것)에 패전책임까지 져야할 중대사안임에도 원균에 비하면 아주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당시 한양에서 모은 병력은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을 모아서 이동의 편의와 속도를 위해 “말”에 태워 보낸 것입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5일 (일) 22:19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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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서라서 이동이 안 되어서 "분류 넘겨주기" 처리를 했더니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123.111.182.4 (토론) 2016년 3월 12일 (토) 12:58 (KST)답변
계정을 만드시면 분류 문서도 이동이 가능합니다. -- ChongDae (토론) 2016년 3월 18일 (금) 13:58 (KST)답변
계정은 있는데, (위에 원균/원사웅 관련 내용을 보시면 표기해 두었습니다.) PC방이라서 로그인을 안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위키 접속하는 사람이 줄곧 저뿐이라서... --123.111.182.4 (토론) 2016년 3월 18일 (금) 18:23 (KST)답변

분류의 인터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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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응이 아닌 이상 인터위키나 위키데이터 연결은 삼가해주세요. 한국어 위키백과의 연도별 분류가 영어 위키백과의 연대(10년대) 분류와 연결되네요 -- ChongDae (토론) 2016년 3월 18일 (금) 13:58 (KST)답변

예. 주의하겠습니다. --123.111.182.4 (토론) 2016년 3월 18일 (금) 18:22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