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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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894년 12월 28일 충청도 서산군 음암면 신장리 (현재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 |
사망 | 1934년 6월 20일 경성부 궁정동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 (39세)
직업 | 소설가, 언론인 |
학력 |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 졸업 와세다 대학 정경과 졸업 |
활동기간 | 1918년 ~ 1934년 |
주요 작품 | |
《청춘예찬》 |
민태원(閔泰瑗, 1894년 12월 28일 ~ 1934년 6월 20일)은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언론인이다. 호는 우보(牛步)이며 부춘산인(富春山人), 우보행인(牛步行人), 민태원(閔台原)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대표 작품으로 산문 《청춘예찬》이 있다.
생애
[편집]1894년 12월 28일에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에서 태어났다.[1][2] 1910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에 재학했고 1924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했다.[3]
1914년에 《매일신보》에 입사하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에 창간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다.[3] 1923년 5월 7일부터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을 맡았다가 1923년 12월 1일부터 1924년 5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서 정치부장을 역임했다.[4] 1924년 5월에 《조선일보》를 자리를 옮기면서 편집국장을 맡았고 1926년 12월 29일부터 1930년 10월에 자진 휴간으로 퇴사할 때까지 《중외일보》에서 편집국장을 맡았다.[3]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매일신보》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번안소설인 《애사》(哀史)를 152회에 걸쳐 연재했다.[5] 1920년에는 문학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다.[6]
1920년에는 《동아일보》에 엑토르 말로의 소설 《집 없는 아이》, 기쿠치 유호(菊池 幽芳)의 소설 《오노가쓰미》(己が罪, 나는 죄이다)의 번안소설인 《부평초》(浮萍草)를 113회에 걸쳐 연재했다.[3] 1922년에는 《동아일보》에 포르튀네 뒤 부아고베의 소설 《철가면》의 번안소설인 《무쇠탈》을 165회에 걸쳐 연재했다.[7] 1929년 6월에는 문학지 《별건곤》(別乾坤)에 청춘을 주제로 한 산문인 《청춘예찬》(靑春禮讚)을 발표했다.[8] 또한 김옥균을 주제로 한 전기문인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집필했다. 1934년 6월 20일에 서울 궁정동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향년 4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3]
주요 작품
[편집]- 번안소설 《애사》(哀史) - 1918년 7월 28일부터 1919년 2월 8일까지 《매일신보》에 152회에 걸쳐 연재됨.
- 소설 《설중매》(雪中梅) - 1919년 5월 23일부터 1919년 8월 31일까지 《매일신보》에 76회에 걸쳐 연재됨.
- 번안소설 《부평초》(浮萍草) - 1920년 4월 1일부터 1920년 9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113회에 걸쳐 연재됨. 1925년에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됨.
- 번안소설 《무쇠탈》 - 1922년 1월 1일부터 1922년 6월 20일까지 《동아일보》에 165회에 걸쳐 연재됨. 1923년에 동아일보사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됨.
- 소설 《죽음의 길》 - 1922년 11월 28일부터 1923년 1월 18일까지 《동아일보》에 45회에 걸쳐 연재됨.
- 소설 《오색의 꼬리별》 - 1930년 10월 28일부터 1932년 3월 20일까지 《매일신보》에 378회에 걸쳐 연재됨.
- 소설 《세 번째의 신호》 - 1933년 5월 18일부터 1933년 10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139회에 걸쳐 연재됨.
- 소설 《천아성》(天鵝聲) - 1934년 1월 1일부터 1934년 4월 23일까지 《매일신보》에 109회에 걸쳐 연재됨.
- 소설 《새 생명》 - 1934년 4월 24일부터 1934년 6월 22일까지 《매일신보》에 49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나 작가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남게 됨.
- 단편 소설 《어느 소녀》 - 1920년 7월에 《폐허》 제1호에 수록됨.
- 단편 소설 《음악회》 - 1921년 1월에 《폐허》 제2호에 연재됨.
- 단편 소설 《만찬》 - 1923년 2월에 《동명》 제23호에 수록됨.
- 수필 《화단(花壇)에 서서》 - 1917년 7월에 《청춘》 제9호에 수록됨.
- 수필 《창전(窓前)의 녹일지(綠一枝)》 - 1921년 6월에 《학지광》 제22호에 수록됨.
- 기행문 《백두산행》(白頭山行) - 1921년 8월 21일부터 1921년 9월 8일까지 《동아일보》에 17회에 걸쳐 연재됨.
- 수필 《황야의 나그네》 - 1923년 5월에 《개벽》 제35호에 수록됨.
- 수필 《추억과 희망》 - 1924년 4월에 《개벽》 제46호에 수록됨.
- 산문 《청춘예찬》(靑春禮讚) - 1929년 6월에 《별건곤》 제21호에 수록됨.
- 시 《겁화》(劫火) - 1922년 9월에 《동명》 제4호에 수록됨.
- 논문 《경제적 파멸에 직면하여》 - 1926년 1월에 《신민》 제9호에 수록됨.
- 논문 《보기 싫은 현실의 환영(幻影)》 - 1926년 9월에 《신민》 제17호에 수록됨.
- 김옥균 전기문 《오호 고균 거사》(嗚呼 古筠 居士, 1926년, 박문서관)
- 김옥균 전기문 《갑신정변과 김옥균》(1947년, 국제문화협회, 사후 출간)
각주
[편집]- ↑ “"세계인을 사로잡은 민태원의 청년정신"”. 《대전일보》.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가 나 “「레미제라블」한국 최초의 번안작가 우보(牛步) 민태원”. 《내포시대》. 2013년 4월 4일.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마 “민태원 - YES24 작가파일”. 《YES24》.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민태원 선생 알아가기, 첫 발걸음 시작됐다”. 《오마이뉴스》. 2022년 10월 10일.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민태원의『레 미제라블』번역 연구 -일본어 기점텍스트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학술지인용색인》.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민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무쇠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청춘과 진보예찬”. 《경남일보》. 2012년 6월 5일. 2022년 10월 3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