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도미니크 오귀스트 시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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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도미니크 오귀스트 시부르
마리 도미니크 오귀스트 시부르 신부 (나다르 작)
원어이름<span class="다른이름" lang="프랑스의 기 프랑스" xml:lang="프랑스의 기 프랑스">프랑스어: Marie Dominique Auguste Sibour
대교구가톨릭 파리 대교구
직책파리의 대주교
임기1848년 10월 13일~1857년 7월 14일
전임자드니 오귀스트 아프레
후임자프랑수아 니콜라 마들렌 몰로
성직
사제서품1818년 7월 14일
수여 로마
개인정보
출생이름마리 도미니크 오귀스트 시부르(프랑스어: Marie Dominique Auguste Sibour)
출생1792년 8월 4일
프랑스 왕국의 기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론알프 드롬 (데파르트망) 니옹의 아롱디스망 트리카스틴 캉통 드롬 쉬드 프로방스 지방의 코뮌 생폴트루아샤토
선종1857년 7월 14일 (64세)
프랑스 제2제국의 기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의 아롱디스망 메트로폴 메트로폴 뒤 그랑 파리 파리 (프랑스)
안장지파리의 생테티엔뒤몽 교회
국적프랑스 식민제국의 기 프랑스 식민제국
근세 프랑스
프랑스 왕국의 기 프랑스 왕국
프랑스 입헌왕국의 기 프랑스 입헌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의 기 프랑스
프랑스 제1제국의 기 프랑스
부르봉 왕정복고의 기 부르봉 왕정복고
7월 왕정의 기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프랑스 제2제국의 기 프랑스
교파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거주지프랑스의 기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의 아롱디스망 메트로폴 메트로폴 뒤 그랑 파리 파리 (프랑스)
전직프랑스 제2제국의 상원의원
문장

마리 도미니크 오귀스트 시부르(프랑스어: Marie Dominique Auguste Sibour)는 1792년 8월 4일 생폴트루아샤토에서 태어나 1857년 7월 14일 파리 (프랑스)에서 사망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파리의 대주교다.

전기[편집]

사제 서품[편집]

1818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그는 가톨릭 파리 대교구에 임명되었다. 그는 1822년 님의 노트르담과 생 카스토르 대성당의전사제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설교자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신문에 미래에 출판했다.

1837년, 휴가 기간 동안, 그는 대교구관리자로 선택되었고, 님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1]

2년 후, 그는 디뉴레뱅으로 올라갔다. 그의 주창자는 조제프 베르네 추기경이고, 그의 주창자는 루이 샤를 장바티스트 미셸장프랑수아 마리 카르다.

아프르 신부의 사망과 교회 연구에 대한 격려[편집]

그의 행정교회 연구에 대한 격려, 대성당의 지회가 수행하는 기능의 중요성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 교회 절차에서 교회법 형식에 대한 충실한 존중으로 특징이 지어졌다. 그는 노동자제사장으로 인정을 받고, 그가 가톨릭 파리 대교구를 통치할 때에도 동일한 규칙이 그를 이끌었다.

1848년 9월, 바리케이드에서 아프르 신부가 사망한 후 그는 프랑스 제2공화국 정부에 빠르게 합류했다. 1849년에 그는 파리에서 지방의회를 열었고, 1850년에는 교구대회를 열었다. 교황 율리오 2세의 사도전승자인 5명의 주교를 봉헌했다.

1853년에 그는 전직에 그를 상원의원으로 임명한 나폴레옹 3세의 결혼을 축하했다. 교황 비오 9세에 대한 답변에서 그는 원죄 없는 잉태의 정의가 부적절하다고 선언했지만, 그 율령의 공포에 참석했고 곧 자신의 교구에서 이를 엄숙하게 발표했다. 제국 정부의 자비로운 지원 덕분에 그는 여러 개의 새로운 본당을 세웠던 교구의 가난한 교회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파리로마 전례를 도입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 만큼 1854년 10월 13일, 그는 벨빌의 새로운 벨빌 생 장바티스트 교회를 축복했다.

말년[편집]

그는 1857년 7월 14일 파리의 생테티엔뒤몽 교회에서 눈에 띄게 균형이 맞지 않고 이미 교회의 승인을 받은 전 장루이 베르제 신부에 의해 의식이 끝난 후 칼에 찔렸다.[2] 이미 교회의 승인을 받았고,[3] 일련의 제재를 받은 종교 당국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베르제 신부는 이미 공공도로에서 일어난 여러 절도 사건이나 스캔들사법부와 갈등을 빚었다. 이전 재판에서 한 의사는 "그는 정신이 온전하지만 위험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2] 1857년 8월 10일 그의 유죄 판결과 집행으로 마무리될 그의 재판은 피고측에서 새로운 비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명예 및 훈장[편집]

도상학[편집]

토마 쿠튀르가 그린 시부르 신부의 초상화(1856년)
조제프 마리우스 라뮈가 그린 제작한 고향 대성당에 있는 시부르 신부의 흉상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1] 님 아카데미 의자 목록
  2. 실뱅, 라뤼 (2009년). 《프랑스의 새로운 형사 사건들》 (프랑스어). 448쪽. 2024년 4월 27일에 확인함. .
  3. L'ouvrage indique que Rome lui avait retiré de la prêtrise en 1856 (voir p. 94).
  4. “Recherche - Base de données Léonore” (프랑스어). 2024년 4월 2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