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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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국(多羅國)은 삼국시대 가야의 소국 중의 하나이다.

유래, 위치[편집]

다라국이 기록에 등장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조에 등장하는 다벌국(多伐國)이 다라국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지만 다벌국은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句火)라고도 하다.

지금의 합천군 쌍책면에 다라리(多羅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땅모양 반달모양이라 하여 붙여졌다 한다. 다라는 대량(大良), 대야(大耶)등으로도 전해지고 현대어로 모두 "달내"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라리와 함께 성산리 일대에 옥전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 다라국의 중심은 쌍책면 일대로 여겨진다. 한편 신라시대에 합천읍에는 대야성이 있어서 신라시대에 합천의 중심이 쌍책면에서 지금의 합천읍으로 옮겨온 듯 하다.

한편 최재석(전 고려대)교수는 다라국의 위치를 규슈의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多良村(다라 마을),多良山(다라산)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의 논쟁을 벌여,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한 적이 있다. 이는 임나가야의 소국의 위치를 일본 큐슈일대로 비정하는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정치,경제,문화[편집]

다라국의 전반에 대해서는 위의 두사서의 기록과 옥전 고분군의 발굴성과가 현재 밝혀진 전부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하한기(下旱岐)와 이수위(二首位)라는 관직이 있었다는 정도이다. 경제는 고분군이 확인된 마을 이름인 옥전(玉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玉)이 많이 산출되었다. 옥전 고분군에서는 신라식과 김해식이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다수의 옥제품및, 보석제의 유물과 함께 토기와 금동제 관모, 환두대도, 고구려풍 투구등이 출토되었다. 고구려풍 투구는 신라문화권의 영향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등자와 말투구등의 많은 량의 마구류가 발굴되었다. 토기는 이후의 도굴피해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발굴되었는데 굽높이 술잔(高盃)이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대개 김해, 함안등지의 것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옥전 2기 4호분에서는 신라식의 것이 나오기도 했다.

역사[편집]

다라국은 다른 소국에 비해 역사가 짧은 것으로 보인다. 400년구야국 중심의 가야연맹이 고구려에 의해 패망하자 변한지역은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국이 들어서기까지 극심한 혼란기에 들어섰고 이시기에 일련의 집단들의 이동이 이루어져 기존소국들의 사회체제가 변화하기도 하고 몇몇 소국들이 무주지에 더 성립되기도 했다. 다라국도 이시기를 전후해 성립된 듯 하다. 그 이전에도 청동기 시대 전후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유물이 출토되기는 했다. 성립되고 얼마뒤 다라국은 대가야에 소속되었고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 신라에 편입되어 대야주(大耶州)가 설치되어 옛 가야땅을 관할하였다가 642년 대야성 전투로 백제에 점령된 후 삼한통일 후 강주강양군(江陽郡)이 되어 지금의 합천이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문헌[편집]

  • 부산대학교 한국민속문화연구소(2000)-가야각국사의 재구성- 조영제/다라국의 위치에 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