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왈기야 할라
구왈갸씨/과이가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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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 | ᡤᡡᠸᠠᠯᡤᡳᠶᠠ ᡥᠠᠯᠠ |
한문 | 瓜尔佳氏 |
전사 | Gūwalgiya hala (목인덕) |
세거지 | 수완, 안추라쿠 등지 |
대표인물 | 피옹돈 오배 승보 영록 관향응 관중 관지림 |
한족성씨 | 관(關) 등 |
구왈기야 할라(만주어: ᡤᡡᠸᠠᠯᡤᡳᠶᠠ
ᡥᠠᠯᠠ Gūwalgiya Hala, 한국 한자: 瓜爾佳氏 과이가씨)는 과륵가씨(瓜勒佳氏)[1], 관이가씨(關爾佳氏)[2], 관가씨(關佳氏)[3]라고도 하는데, 만주족과 시버족의 성씨로 만주팔대성 중 하나였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1권의 부록 『금사성씨고(金史姓氏考)』에는 금대(金代) 협고씨(夾古氏)와 가고씨(加古氏)[4] 그리고 고리갑씨(古里甲氏)[5]가 구왈갸씨의 전음이라고 기술했다.[6]
하라(哈拉, Hala)의 명칭은 지명, 천명, 씨족의 토템 등에서 다양하게 가져와서 사용했는데, 구왈갸 하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하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분화가 진행되었고, 하나의 하라가 나뉘어서 따로 거주하는 두 개 이상의 동성 씨족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무쿤(穆昆, Mukūn)이라고 한다. 예컨대 구왈갸 하라는 수완(蘇完, 만주어: ᠰᡠᠸᠠᠨ Suwan)이나 예허(葉赫, 만주어: ᠶᡝᡥᡝ Yehe) 등 12개의 무쿤으로 분화되었다.[7]
신해혁명으로 무능하고, 부패가 절정인 봉건전제의 청 제국이 와해되었지만, 진정한 공화정치가 실현되지 못하고 군벌의 통치가 뒤를 이었으며 민족 차별 정책이 수반되었다. 전국 각지의 주방팔기(駐防八旗)들은 예를 들어 서안·남경·항주·형주 등지에서 무고한 만주족 관병을 살해하는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에 따라 만주족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족(漢族)의 성씨로 바꾸는 것이 적지 않았다. 만주족이 많은 북경지역에서는 소수의 달관 · 현귀이기 때문에 족속과 성씨를 바꿀 방법이 없는 사람 이외에 일반적으로 만주인들은 족속과 성씨를 바꾸는 숫자가 적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는다면 입에 풀질하고 살 방도조차 찾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직장이나 일자리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8] 따라서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대부분의 구왈갸씨는 한성(漢姓) 관(關)씨로 가장했고, 일부는 포(鲍), 왕(汪), 이(李), 고(高), 고(顾), 백(白), 곽(郭), 소(苏), 협(叶), 희(喜), 후(侯), 삼(森), 동(佟), 송(荣), 항(恒), 문(门), 오(吴) 등의 성씨를 사용했다.[9]
울라의 마지막 버이러(貝勒, Beile)인 부잔타이(布占泰, 만주어: ᠪᡠᠵᠠᠨᡨᠠᡳ ᠪBujantai)의 후손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오랍합살호패륵후배당책(烏拉哈薩虎貝勒後輩檔冊)》에 따르면, 금나라 완안씨의 후손인 나치부루(納奇卜祿, 만주어: ᠨᠠᠴᡳᠪᡠᠯᡠ Nacibulu)는 조부 때부터 대대로 시버의 수완 구왈갸 씨족(蘇完瓜爾佳氏, 만주어: ᠰᡠᠸᠠᠨ
ᡤᡡᠸᠠᠯᡤᡳᠶᠠ
ᡥᠠᠯᠠ Suwan Gūwalgiya Hala)에 의지하며 혼인관계를 형성했는데, 나치부루는 이들로부터 독립하여 후룬강(忽喇溫江, 만주어: ᡥᡡᠯᡠᠨ
ᡠᠯᠠ Hūlun Ula)[10] 일대에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후룬(忽剌國, 만주어: ᡥᡡᠯᡠᠨ
ᡤᡠᡵᡠᠨᡳ Hūlun Gurun)이라는 초기국가를 형성했다.
청대 세가
[편집]기타지역
[편집]양황기 투등어의 거점지역은 페이유성으로, 그의 증손자 번타이는 호군학교, 절강을 정벌하고, 운남에서 공로가 있어 기도위 세직을 받았고, 관서좌령, 을 맡고, 부나타이는 효기학교를 거쳐, 운남을 정벌한 공이 있어 운기위 세직을, 관직은 성문위에 이르렀다. 정백기 어후더의 아들 후투는 호군학교를 거쳐 복건 정벌, 호광, 산동 등지에서 조현 제일등성에 공이 있어 운기위의 세직을 받고, 관서 호군통령에 이르렀다. 양홍기 더푸서의 증손자 더푸는 전봉시위로, 준가르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고, 운기위에 추증되었다.
정황기 슈롱상구리의 거점지역은 호이파로, 그의 4세손인 아린은 전봉교를 거쳐, 준가르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고, 운기위에 추증되었다. 양백기 다바의 원손인 툰주후가 방어를 맡았고, 광서와 운남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운기위 세습직을 받았다. 양람기 마툰의 증손자인 다이인투는 위서효기교를 거쳐, 강서 정벌, 운남에서의 공이 있어 운기위 세직을 받았다. 양람기 와이샨의 아들 완다리는 호군교를 거쳐 악주부에서 전사하여 운기위에 추증되었다.
근현대 시기 유명 인물
[편집]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자 관향응이 장백산 과이가씨 출신이다. 홍콩 배우 주해미의 선조가 광저우 주둔 양백기 기인이다. 이 밖에 관중 전 중화민국 고시원장, 배우 호인몽, 홍콩 배우 관산과 딸 관지림, 관보혜가 있으며, 중국 대륙 배우 관효동도 과이가씨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刘庆华 (2010). 《满族家谱序评注》. 辽宁民族出版社. 90쪽. ISBN 9787807229445.
- ↑ 刘庆华 (2010). 《满族家谱序评注》. 辽宁民族出版社. 83~85쪽. ISBN 9787807229445.
- ↑ 赵尔巽等 (1998). 《清史稿》. 中华书局. 12587, 11478~11479쪽. ISBN 9787101007503.
- ↑ 郑天挺(1980), 《探微集》,中华书局, 정천정은 《애신각라득성계의(爱新觉罗得姓稽疑)》에서 건륭(乾隆) 연간 『금사(金史)』에는 여진 인명과 여진어를 만주 문자 혹은 한자로 주석을 달았는데,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 만주어: ᠵᠠᡴᡡᠨ
ᡤᡡᠰᠠᡳ
ᠮᠠᠨᠵᡠᠰᠠᡳ
ᠮᡠᡴᡡᠨ
ᡥᠠᠯᠠ
ᠪᡝ
ᡠᡥᡝᡵᡳ
ᡝᠵᡝᡥᡝ
ᠪᡳᡨᡥᡝ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에 협곡씨(夹谷氏)만 주석이 달지 않았고, 건륭 연간 『금사(金史)』의 협곡의 표음(標音)은 객이고(喀爾庫)라 표기한 것을 한어 발음의 각도에서 추론하여 이 두 개 단어가 무관함을 밝혔으며, 따라서 건륭제가 『금국어해(金國語解)』를 정할 때, 만주 울라에 거주했던 카르쿠씨(喀爾庫氏, 만주어: Karku Hala)를 협곡씨라고 하여 그들이 아이신 기오로를 비롯한 교로 할라의 선대임을 스스로 숨긴 것으로 의심했다. 즉, 《금사성씨고》에서 협곡씨가 구왈갸 하라의 선대라고 한 것도 조작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 중~근세 시기 북경 일대 중국어에서 '夾' '加', '甲'자의 발음은 gia에 가깝게 발음하였다. 일례로 조선 초기의 문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의 6대조 먼터무의 이름을 '夾溫猛哥帖木兒'라고 기록하였으며, 이를 한글로 '갸온멍거터물'이라고 표기하였다. '갸온멍거터물'은 '夾溫猛哥帖木兒'의 조선식 한자 발음이 아닌 당시 명(明)의 수도 북경(北京) 인근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었다. 그러했을 때 '夾'자는 '갸(gia)'로 발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경 일대 중국어에서 성모(聲母, 한국어의 초성 자음) g, k에 운모(韻母, 한국어의 중성+종성) 평순모음 i가 합쳐진 gi, ki는 청 중기 이후 구개음화가 진행되면서 각각 ji(예: 基)와 qi(예: 其)로 변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반면 산동(山東) 지역 방언에는 아직도 중세 중국어 발음이 남아 있다. 일례로 한국 중국요리 가운데 '라조기(辣子鷄)'가 있다. '辣子鷄'는 경우 청 중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북경어로 '라즈지(laziji)'로 발음되지만, 근현대 시기 산동 화교들이 한반도에 건너와서 중국요리집을 차리면서 산동 발음인 '라즈기/라조기'로 발음한 것이 오늘날 '라조기'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 ↑ 赵力.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456쪽. ISBN 9787549702862.
- ↑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7쪽. ISBN 9788994606514.
- ↑ 金啓孮,《滿族歷史與文化簡編》, 327쪽
- ↑ 赵力.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456쪽. ISBN 9787549702862.
- ↑ 흑룡강성에 흐르고 있는 호란강(呼蘭河, 만주어: ᡥᡡᠯᠠᠨ
ᡠᠯᠠ Hūlan Ula)의 고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