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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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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국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써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ref>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ref>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국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써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ref>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ref>

하지만 최근에는 대한민국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평양시]] 일대에서 발견된 낙랑 유물은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의 유적이 아니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나오는 최리왕의 [[낙랑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박선희 교수는 평양시 낙랑 구역의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 유물에서 사용된 실크천을 조사한 결과 [[한나라]]의 실크가 아니라 [[고조선]]의 고유한 실크천이라는 점을 근거로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종래의 통설에 문제점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기와에 적힌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琅富貴) 등의 명문에 있는 필획을 분석한 결과 한나라의 것이 아니라 문양을 강조한 고조선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평양시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근거로 한사군이 평양시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ref>박선희 교수, 〈[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193609&section=sc1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ref> 한편 김종서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중국 문헌에 나오는 한사군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한사군은 평양시 일대가 아니라 중국 [[허베이성]] 동쪽에서 [[랴오허]](遼河) 서쪽으로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ref>권재현 기자, [http://news.donga.com/3//20060227/8279212/1 〈김종서 씨 "고조선-한사군 中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 《동아일보》, 2009년 9월 30일</ref>


=== 성격 ===
=== 성격 ===

2012년 3월 4일 (일) 04:05 판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추정하는
한사군의 위치[1]

낙랑군(樂浪郡)은 한나라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중 하나로 4군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유일한 군이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북부의 중국 변군(邊郡)으로 존속하였다. 일부 학자들 및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 또는 요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은 위만조선 영내에 낙랑군을 비롯한 3개 군을 설치(이듬해에 현도군을 추가로 설치함)하여 위만조선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에 무딪혀 기원전 82년, 진번·임둔의 두 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병합시켰으며 기원전 75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新)의 왕망(王莽)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太尹)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 찍힌 봉니(捧泥)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파일:CE200sKorea.PNG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204년)[2]

2세기 후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요동군(遼東郡)을 중심으로 공손탁(公孫度)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 및 한이 강성하여 낙랑군은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公孫康)은 204년에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公孫摸)·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流民)을 막았다.

(魏)가 건국된 후 명제(明帝)는 238년, 사마의(司馬懿)를 파견하여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낙랑·대방을 평정하였다. 서진(西晋)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276년에는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신설하고 낙랑·대방을 속하게 하였다. 300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였다. 313년 미천왕은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낙랑·대방의 군벌 장통(張統)은 모용씨(摹容氏)에게 투항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축출되었다.

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北魏)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속 현

낙랑군의 소속 현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 《한서》에는 25개 현, 《후한서》에는 18개 현이 소속된 것으로 나타나며, 《진서》에는 낙랑군 소속으로 6개 현, 대방군 소속으로 7개 현이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낙랑군의 호구 조사 목간(기원전 45년)에는 모두 25개 현의 호구가 기록되어 있다. 아래 표는 목간에 나타난 순서를 따라 정리한 것이다.[3]

낙랑군의 소속 현
현의 이름 추정되는 위치 연혁
조선현(朝鮮縣)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토성동
낙랑토성 [4]
원래 고조선의 왕험성으로 추정
남감현(䛁邯縣) 위치 미상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남
증지현(增地縣) 위치 미상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남
점제현(黏蟬縣)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 [4]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남, 점제현신사비 출토
사망현(駟望縣) 위치 미상 서진 시기까지 계속 존속
둔유현(屯有縣) 위치 미상
(이병도는 황해북도 황주군에 비정)
서진 시기까지 계속 존속, 공손탁이 둔유현 이남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
대방현(帶方縣) 황해북도
사리원시
당토성(唐土城) [5]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에 소속됨, 공손탁이 대방군을 설치하고 치소로 삼음
열구현(列口縣) 황해남도
은률군 [6]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에 소속됨, 공손탁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대방군에 소속됨
장잠현(長岑縣) 위치 미상
황해남도 신천군 남부면 봉황리 추정[7][4]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에 소속됨, 공손탁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대방군에 소속됨
해명현(海冥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에 소속됨, 공손탁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대방군에 소속됨
소명현(昭明縣) 황해남도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가 설치됨. 공손탁이 설치한 대방군에는 소명현이 없고, 남신현(南新縣)이 나타남
제해현(提奚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에 소속됨, 공손탁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대방군에 소속됨
함자현(含資縣) 위치 미상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 유성리 추정[8][4]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진번군에 소속됨,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남부도위에 소속됨, 공손탁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대방군에 소속됨
수성현(遂城縣) 위치 미상
(이병도는 황해북도 수안군에 비정)[9]
서진 시기까지 계속 존속
누방현(鏤方縣) 평안남도
성천군 [10]
서진 시기까지 계속 존속
혼미현(渾彌縣) 위치 미상 서진 시기까지 계속 존속
패수현(浿水縣) 위치 미상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남
탄열현(吞列縣) 위치 미상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남
동이현(東暆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이 설치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가 설치됨, 후한 시기에 철폐
잠태현(蠶台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에 소속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에 소속됨, 후한 시기에 철폐
불이현(不而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에 소속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에 소속됨, 후한 시기에 철폐
화려현(華麗縣) 함경남도
금야군 [11]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에 소속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에 소속됨, 후한 시기에 철폐
사두매현(邪頭昧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에 소속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에 소속됨, 후한 시기에 철폐
전막현(前莫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에 소속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에 소속됨, 후한 시기에 철폐
부조현(夫租縣) 함경남도
함주군 [12]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의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 후 임둔군에 소속됨, 임둔군 폐지 후 낙랑군에 편입, 동부도위에 소속됨, 후한 시기에 철폐

문화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실제로 조선을 통치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玄菟郡) 정도였으며, 그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 동쪽(東)의 임둔군(臨屯郡)과 남쪽(南)의 진번군(眞番郡) 그리고 후일 설치된 대방군(帶方郡) 역시 1세기밖에 존속하지 못하였고, 현도군도 두 차례나 이동하였기 때문에 한군현의 문화는 대체적으로 낙랑 중심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낙랑군의 위치 및 성격에 대한 논란

위치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였다.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13]

그러나 신채호 등의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낙랑군이 요동 일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조선의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 일부 학자들은 낙랑군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14]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5] 1993년에 랴오닝 성 금성현에서 임둔태수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발견되어 ‘요서설’의 주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16]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국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써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17]

하지만 최근에는 대한민국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평양시 일대에서 발견된 낙랑 유물은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의 유적이 아니라 호동왕자낙랑공주 설화에 나오는 최리왕의 낙랑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박선희 교수는 평양시 낙랑 구역의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 유물에서 사용된 실크천을 조사한 결과 한나라의 실크가 아니라 고조선의 고유한 실크천이라는 점을 근거로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종래의 통설에 문제점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기와에 적힌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琅富貴) 등의 명문에 있는 필획을 분석한 결과 한나라의 것이 아니라 문양을 강조한 고조선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평양시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근거로 한사군이 평양시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18] 한편 김종서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중국 문헌에 나오는 한사군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한사군은 평양시 일대가 아니라 중국 허베이성 동쪽에서 랴오허(遼河) 서쪽으로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19]

성격

  • 낙랑군은 한사군의 대표격으로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및 국사교과서에는 낙랑군만이 평안도 일대에 남아 한나라와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언급 외에는 한사군에 대해서 거의 설명되지 않고 있다.
  • 낙랑군 자체의 성격에 대하여 실질적인 중국의 군현 체제로 존속하였던 것은 전한 및 후한 시기에 불과하였으며 대부분의 시대에는 중국계 유이민 세력의 군벌 세력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낙랑과 낙랑국

30년 경에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관련된 호동 설화에 등장하는 최리의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보기도 한다.

관련 항목

주석

  1.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편,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출판사, 2004 중 24페이지를 참고
  2. 한국 사학계에서 추정하는 위치
  3. 이 표의 전체 내용은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두산백과사전 EnCyber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박영사, 1976를 참고하였다.
  4.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
  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1장 진번군고 125~126쪽, 박영사, 1976
  6.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1장 진번군고, 박영사, 1976, 126
  7. 전주농, 〈신천에서 대방군 장잠장왕경의 무덤 발견〉, 《문화유산》 1962-3, 1962년, 76~77페이지
  8. 일민함자왕군묘(逸民含資王君墓) 명문전 출토
  9.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2장 낙랑군고, 박영사, 1976, 148
  10.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2장 낙랑군고 149~150쪽, 박영사, 1976
  11.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4장 임둔군고 207~208쪽, 박영사, 1976
  12.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4장 임둔군고 206~207쪽, 박영사, 1976
  13. 한국목간학회 판독회 보도
  14. 송호정, 〈남북역사학의 쟁점 고대사의 강역, 어디까지 우리 땅이었나〉, 《역사비평》13호, 1990
  15.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16. 1. "요서땅 임둔군은 고조선 유물의 보고, " 국제신문 2008년 9월 3일자
  17.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18. 박선희 교수,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
  19. 권재현 기자, 〈김종서 씨 "고조선-한사군 中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 《동아일보》, 2009년 9월 30일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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