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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일랑 유나이티드 ===
=== 게일랑 유나이티드 ===
주리치는 2001년에 [[게일랑 인터내셔널 FC|게일랑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공격수인 모흐드 노르 알리와의 강한 이해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나중에 싱가포르 암드 포스에서 모방한 파트너십을 "자신들의 모든 목표들 가운데 최소 절반"을 달성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주리치는 2001년에 [[게일랑 인터내셔널 FC|게일랑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공격수인 모흐드 노르 알리와의 강한 이해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나중에 싱가포르 암드 포스에서 모방한 파트너십을 "자신들의 모든 목표들 가운데 최소 절반"을 달성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ref>{{뉴스 인용|저자=Shamir Osman|제목=Geylang won't do SAFFC any favours|뉴스=Today|쪽=56|날짜=2009년 9월 9일}}</ref>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 S리그 시즌 결승전에서 주룽을 누르고 5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주리치는 해당 시즌에서 37골을 기록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년 싱가포르컵 결승전에서 홈 유나이티드를 상대했다. 홈 유나이티드는 전반전에 주리치와 브라이언 보트웰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4-0으로 앞서나갔다. 또한 수비수 노흐 라흐만은 무릎 인대 부상으로 인해 빠져나갔고 노르 알리는 퇴장을 당했다. 결국 게일랑 유나이티드 9명만 뛰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홈 유나이티드에 0-8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 [[장정 (축구인)|장정]]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에 가진 인터뷰에서 주리치가 7명의 선수들과 함께 팀을 떠날 것이라고 밝혔지만 주리치는 3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주리치는 4시즌 동안 게일랑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126경기에 출전하여 97골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S리그에서 통산 100골을 기록한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 S리그 시즌 결승전에서 주룽을 누르고 5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주리치는 해당 시즌에서 37골을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저자=Gerard Wong|제목=Geylang regains the title|뉴스=The Straits Times|쪽=1|날짜=2001년 10월 25일}}</ref>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년 싱가포르컵 결승전에서 홈 유나이티드를 상대했다. 홈 유나이티드는 전반전에 주리치와 브라이언 보트웰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4-0으로 앞서나갔다. 또한 수비수 노흐 라흐만은 무릎 인대 부상으로 인해 빠져나갔고 노르 알리는 퇴장을 당했다. 결국 게일랑 유나이티드 9명만 뛰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홈 유나이티드에 0-8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ref>{{뉴스 인용|저자=Marc Lim|제목=A night of utter shame for Geylang|뉴스=The Straits Times|쪽=1|날짜=2001년 11월 5일}}</ref> [[장정 (축구인)|장정]]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에 가진 인터뷰에서 주리치가 7명의 선수들과 함께 팀을 떠날 것이라고 밝혔지만<ref>{{뉴스 인용|저자=Stanley Ho|제목=Geylang humiliated|뉴스=Today|쪽=30|날짜=2001년 11월 5일}}</ref> 주리치는 3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주리치는 4시즌 동안 게일랑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126경기에 출전하여 97골을 기록했다. 2003 S리그 시즌에서는 리그 통산 100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The fourth Mr 100|뉴스=The Straits Times|쪽=7|날짜=2003년 7월 10일}}</ref>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한 [[2002년 FIFA 월드컵]]의 성공을 계기로 [[AFC 챔피언스리그]]와 [[AFC컵]]을 출범시키면서 대륙간 클럽 대항전을 강화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 S리그 우승 팀 자격으로 [[2002-03년 AFC 챔피언스리그]] 예선에 참가했다. 주리치는 DPMM과의 동부 지역 예선 홈 경기에서 1골, 원정 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고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합계 7-0 승리를 기록했다. 주리치는 [[중국 축구 갑급 A리그]]에 소속되어 있던 [[상하이 선화]]와의 최종 예선 2차전에서 1골을 기록했으나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합계 1-5 패배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한 [[2002년 FIFA 월드컵]]의 성공을 계기로 [[AFC 챔피언스리그]]와 [[AFC컵]]을 출범시키면서 대륙간 클럽 대항전을 강화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 S리그 우승 팀 자격으로 [[2002-03년 AFC 챔피언스리그]] 예선에 참가했다.<ref>{{웹 인용|url=http://s-leaguefootball.blogspot.sg/2009/10/200203-afc-champions-league.html|제목=2002/03 AFC Champions League|website=S-league: Facts & Figures|확인날짜=2014년 3월 29일}}</ref> 주리치는 DPMM과의 동부 지역 예선 홈 경기에서 1골, 원정 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고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합계 7-0 승리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Sleepy Geylang carves out 3-0 win|뉴스=The Straits Times|쪽=14|날짜=2002년 10월 7일}}</ref><ref>{{뉴스 인용|제목=Easy 4-0 win for Geylang|뉴스=The Straits Times|쪽=11|날짜=2002년 10월 24일}}</ref> 주리치는 [[중국 축구 갑급 A리그]]에 소속되어 있던 [[상하이 선화]]와의 최종 예선 2차전에서 1골을 기록했으나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합계 1-5 패배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ref>{{뉴스 인용|제목=No farewell joy for Jang|뉴스=The Straits Times|쪽=15|날짜=2002년 11월 28일}}</ref>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3 S리그 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2004년 AFC컵]]에 처음 출전했다. 주리치는 [[페락 FA]]와의 8강 1·2차전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했다. 주리치는 해당 대회에서 5골을 기록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알와흐다 SC (시리아)|알와흐다]]와의 준결승전에 진출했으나 1차전에서 0-1 패배를 기록했고 2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승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3 S리그 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2004년 AFC컵]]에 처음 출전했다. 주리치는 [[페락 FA]]와의 8강 1·2차전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했다. 주리치는 해당 대회에서 5골을 기록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알와흐다 SC (시리아)|알와흐다]]와의 준결승전에 진출했으나 1차전에서 0-1 패배를 기록했고 2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승전 진출이 좌절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Marc Lim|제목=A match away from $250,000|뉴스=The Straits Times|쪽=H11|날짜=2004년 10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저자=Marc Lim|제목=Historic cup final hopes in tatters after 12 short minutes|뉴스=The Straits Times|쪽=13|날짜=2004년 10월 27일}}</ref>


=== 싱가포르 암드 포스 ===
=== 싱가포르 암드 포스 ===

2021년 12월 15일 (수) 17:38 판

알렉산다르 주리치(, 1970년 8월 12일 ~ )는 싱가포르의 전 축구 선수이다. 그는 현재 싱가포르 스포츠 교장과 액티브SG 풋볼 아카데미의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최고 아마추어 축구 리그인 싱가포르 코스모폴리탄 풋볼 리그에서 프로 축구에서 은퇴하기 전 SCC 퍼스트에서 뛰었다. 그는 강인한 체력과 다작의 스트라이커로 주목받았다. 그의 전문적 접근과 절제된 생활 방식은 30년 이상의 경력 연장에 기여했다.

주리치는 15살 때 유고슬라비아 주니어 카약 챔피언이었고 17살에 세계 8위에 올랐다. 그는 1992년 하계 올림픽 C-1 500m 카누 종목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대표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그는 축구 경력을 재개하기 위해 헝가리로 돌아왔다. 1999년, 그는 S리그의 탄종 파가르 유나이티드와 계약하였다.리그에서는 처음으로 공격수로 전향했다. 그는 이후 홈 유나이티드, 게일랑 유나이티드, 싱가포르 무장 단체, 탐핀스 로버스 등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는 16시즌 동안 8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싱가포르 컵 우승을 거두었고, 3번의 올해의 선수상과 4번의 득점왕을 차지했다.

국제 무대에서, 그는 2007년 37세의 나이로 싱가포르를 위해 데뷔했다. 그는 2008년 5월에 주장으로 선발 출전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그는 2008년, 2010년, 2012년 AFF 챔피언십에 참가했던 싱가포르 선수 명단이다. 2012년 12월, 그는 53경기 출전 24골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2013년, 그는 그의 클럽 탐핀스 로버스 전임 코치로 부임했다. 그는 2014년 11월 44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어린 시절

알렉산다르 주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도보이 외곽에 위치한 리파츠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에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서포터였던 주리치는 고향의 축구 클럽인 FK 슬로가 도보이의 유소년 팀에서 골키퍼미드필더로 활동했다.[1][2][3] 주리치는 또한 12세 시절에 가슴의 성장 장애를 치료하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카약을 배우기 시작했다.[4][5] 주리치는 15세 시절에 유고슬라비아 주니어 카약 챔피언이 되었고 17세 시절에는 세계 8위에 올랐다.[6][7]

주리치는 17세 시절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징집되어 장교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임박하자 주리치의 아버지는 가족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주리치와 그의 형제 가운데 한 명이 나라를 떠나기를 원했다.[4] 주리치는 나이가 어린 스포츠 선수인 만큼 고향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주리치는 "아버지는 이 전쟁에서 싸웠고 동생은 거의 5년 동안 싸웠으며 어머니는 1993년에 무슬림 군대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마을을 폭격해서 우리 집에 직격탄을 날렸어요. 정말 큰 폭탄이 터졌고 제 어머니는 즉사하셨습니다. 저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이 피비린내 나는 이 내전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지만 저는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저는 인종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보고 이곳 싱가포르에서 무슬림 어린이를 입양했습니다."라고 밝혔다.[4] 주리치는 불과 300 독일 마르크를 달고 세르비아로 건너가서 1시즌 동안 2부 리그에서 뛰었다. 주리치는 나중에 스웨덴에서 AIK와 함께 훈련했다 난민 신청을 거절했다.[4] 주리치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인하여 공인된 여권 없이 헝가리에서 발이 묶였다. 주리치는 헝가리 축구 2부 리그에서 활동하던 세게드 LC에서 가족들이 주리치에게 숙소와 계약을 제안하기 이전까지 세게드의 카페와 식당을 돌아다녔다.[4]

1992년 하계 올림픽

주리치는 1992년에 새롭게 결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올림픽 위원회로부터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 카누 남자 C-1 500m 경기에 출전하라는 초청을 받았다.[8] 2년 동안 훈련을 받지 못했던 주리치는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 사이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포츠 선수라고 결정하면서 그러한 요청을 받아들였다.[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올림픽 위원회가 그의 여행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주리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1,500km를 히치하이킹해야만 했다. 주리치는 국가 올림픽 위원회의 서한과 유효한 여권 없이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트럭을 타고 갈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가 난민이라고 생각하고 불신하던 이민 당국에 의해 통행을 거부당했다.[10] 오스트리아 국경수비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올림픽 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그의 신임을 확신시켰고 슬로베니아로 가는 도중에 주리치를 설득하는 것을 도왔다. 주리치는 공항으로 가는 다른 차를 얻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9]

2일 동안의 트레킹을 마친 주리치는 1992년 하계 올림픽에 데뷔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선수 1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주리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카누 국가대표팀으로부터 장비를 빌려 경기에 임했으나[11] 패자부활전에서 탈락했다. 주리치는 올림픽이 끝난 다음에 헝가리의 세게드 LC에서 자신의 축구 선수 경력을 재개하게 된다.[5]

클럽 경력

오스트레일리아

과거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프랭크 어록은 헝가리 혈통을 가진 세르비아 출신의 전직 축구 선수였는데 주리치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12][4] 주리치는 1995년에 내셔널 사커 리그 소속 축구 클럽인 사우스 멜버른 헬라스로 이적하면서 수비수로 뛰었다. 주리치는 또한 포트 멜버른 샤크스, 깁스랜드 팰컨스, 헤이들버그 유나이티드, 웨스트 애들레이드와 같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축구 클럽에서도 뛰었고 1997년에는 중국의 축구 클럽인 훠처터우 산산에서 잠깐 동안 뛰기도 했다.[12][13]

1999년에는 주리치가 뛰고 있던 축구 클럽인 웨스트 애들레이드가 파산했다.[13] 주리치는 홍콩과 싱가포르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싱가포르의 축구 클럽인 탄종 파가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S리그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13] 주리치는 주로 왼쪽 측면 윙어나 왼쪽 수비수로 활약하였다.[13] 탄종 파가 유나이티드의 감독이었던 토하리 파이잔은 192cm의 키를 가진 주리치를 공격수로 전향시켰다.[5] 주리치는 리그 16경기에서[14] 11골을 기록했고 팀은 3위를 차지했다.[15]

시즌 종료 이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온 주리치는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오스트레일리아 시민권을 취득했다.[11] 주리치는 시드니를 연고로 하던 축구 클럽인 마르코니 스탤리언스에서 뛰었고 왼쪽 미드필더로 복귀했다.[16]

주리치는 2000년 6월에 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여 다시 공격수로 활약하였다.[14] 주리는 자신의 새 클럽을 위해 모든 대회를 통틀어 11골을 기록했다. 특히 싱가포르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2000년 싱가포르컵 결승전에서는 45,000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17] 주리치는 시즌이 끝난 이후에 구단에 의해 방출되었다.[18]

게일랑 유나이티드

주리치는 2001년에 게일랑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공격수인 모흐드 노르 알리와의 강한 이해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나중에 싱가포르 암드 포스에서 모방한 파트너십을 "자신들의 모든 목표들 가운데 최소 절반"을 달성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19]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 S리그 시즌 결승전에서 주룽을 누르고 5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주리치는 해당 시즌에서 37골을 기록했다.[20]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년 싱가포르컵 결승전에서 홈 유나이티드를 상대했다. 홈 유나이티드는 전반전에 주리치와 브라이언 보트웰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4-0으로 앞서나갔다. 또한 수비수 노흐 라흐만은 무릎 인대 부상으로 인해 빠져나갔고 노르 알리는 퇴장을 당했다. 결국 게일랑 유나이티드 9명만 뛰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홈 유나이티드에 0-8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21] 장정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에 가진 인터뷰에서 주리치가 7명의 선수들과 함께 팀을 떠날 것이라고 밝혔지만[22] 주리치는 3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주리치는 4시즌 동안 게일랑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126경기에 출전하여 97골을 기록했다. 2003 S리그 시즌에서는 리그 통산 100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23]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한 2002년 FIFA 월드컵의 성공을 계기로 AFC 챔피언스리그AFC컵을 출범시키면서 대륙간 클럽 대항전을 강화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1 S리그 우승 팀 자격으로 2002-03년 AFC 챔피언스리그 예선에 참가했다.[24] 주리치는 DPMM과의 동부 지역 예선 홈 경기에서 1골, 원정 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고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합계 7-0 승리를 기록했다.[25][26] 주리치는 중국 축구 갑급 A리그에 소속되어 있던 상하이 선화와의 최종 예선 2차전에서 1골을 기록했으나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합계 1-5 패배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27]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2003 S리그 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2004년 AFC컵에 처음 출전했다. 주리치는 페락 FA와의 8강 1·2차전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했다. 주리치는 해당 대회에서 5골을 기록했다. 게일랑 유나이티드는 알와흐다와의 준결승전에 진출했으나 1차전에서 0-1 패배를 기록했고 2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승전 진출이 좌절되었다.[28][29]

싱가포르 암드 포스

주리치는 2004년 11월에 싱가포르 암드 포스(현재의 워리어스)와의 계약을 체결했다.[30] 싱가포르 암드 포스는 S리그에서 4차례 우승했고 싱가포르컵에서 2차례(2007, 2008 시즌) 우승했다. 특히 주리치는 3번의 시즌(2007, 2008, 2009 시즌)에서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31][32][33]

주리치는 리그 150번 경기에서 129골을 기록했고 2007, 2008 시즌에서 S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31][32] 주리치는 2007년 7월 9일에 열린 랴오닝 광위안과의 경기에서 5분 동안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리그 200호골을 기록했다.[34] 주리치는 자신의 38번째 생일에 열린 게일랑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는 2골을 기록하면서 미르코 그라보바츠가 갖고 있던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인 244골을 갱신했는데 싱가포르 암드 포스는 2-2 무승부를 기록했다.[35] 싱가포르 암드 포스는 홈 유나이티드와의 2008년 채리티 실드 경기에서 정규 시간 동안 1-1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에 승부차기 5-4 승리를 기록했다.[36]

2009년에는 싱가포르 암드 포스가 AFC 챔피언스리그플레이오프에서 PEA(현재의 부리람 유아니티드), PSMS 메단을 꺾고 처음으로 조별 예선에 진출했다.[37][38][37] 싱가포르 암드 포스는 조별 예선에서 가시마 앤틀러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상하이 선화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주리치는 2009년 5월 19일에 열린 수원 블루윙즈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다.[39] 그러나 싱가포르 암드 포스는 조별 예선에서 1무 5패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

주리치는 2009년 9월에 인도네시아 슈퍼리그 소속 축구 클럽인 스리위자야와 110,000 미국 달러 규모의 계약에 서명했다.[40] 그러나 주리치는 한 달 뒤에 스리위자야가 상호 합의한 계약 조건을 변경하려다 결국 거절했다고 언론에 밝혔다.[41]

탐핀 로버

주리치는 싱가포르 군대와 스리위자야로 전근하려고 시도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2010년, 그는 탐핀스 로버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리그 첫 시즌에 20골을 넣었고,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는 3연속 S로 결말을 지었다.2011년부터 2013년까지 탐핀스 로버스의 리그 우승과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번의 채리티 실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0년 9월 27일, 그는 발레스티어 칼사와의 싱가포르 컵 경기에서 2골을 넣어 300호 골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2011년 7월 IFFHS는 주리치를 444경기에 출전하여 328골을 득점왕에 올려놓았다. 그는 2012년에 세 번째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2013년에 문순호와 함께 리그 득점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주리치는 클럽 경영진으로부터 2012년 말 은퇴 계획을 연기할 것을 확신받으면서 2014년 시즌을 끝으로 프로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국내 최다인 378골을 기록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탐피네스는 1차 예선에서 남중국에 패한 후 2014년 AFC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2014년 AFC컵에서 탈락하였고,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였다. 그는 35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기록하였고, 탐피네스는 리그를 3위로 마감하였다. 2014년 11월 5일 브루나이 DPMM과의 싱가포르 컵 3위 결정전 경기에서 은퇴하였다.

아마추어 축구로 돌아가기

주리치는 2017년에 경쟁 축구에 복귀하여 싱가포르 크리켓 클럽에 가입하고 싱가포르 최고의 아마추어 축구 리그인 코스모폴리탄 풋볼 리그에 참가하였다.

국제경력

주리치는 2007년 9월 27일 싱가포르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까지 3번의 개인적 시도가 있었다. 2007년 11월 1일,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라도이코 아브라모비치는 싱가포르 여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2010년 11월 9일 타지키스탄과의 2010년 FIFA 월드컵 2차 예선 1차전에서 37세 89일의 나이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두 골을 모두 넣어 2-0 승리에 일조했다. 주리치는 공격형 미드필더 시자이와 공격수 인드라 샤단 다우드의 부상으로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2차전에서 1-1로 비긴 싱가포르는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우즈베키스탄과 비기면서 처음으로 아시아 지역 예선에 진출하였다. 그는 레바논과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국제 무대에서 좋은 폼을 이어갔는데, 싱가포르는 4조에서 3위를 차지했다.

2008년 5월 28일, 바레인과의 친선경기에 주장인 인드라 사단과 부주장 리오넬 루이스가 결장하면서, 주리치는 처음으로 싱가포르의 주장을 맡았고, 외국 태생 선수로는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찼다.

주리치는 2008년 AFF 챔피언십에 참가하였으나, 캄보디아와의 개막전에서 피불라 부상을 당해 남은 대회에서는 제외되었다. 싱가포르는 준결승전에서 베트남에 졌다.

그는 2010년 AFF 챔피언십을 앞두고 싱가포르 대표팀에 소집되었다. 싱가포르는 필리핀과 개막전에서 주리치의 골로 1-1로 비겼다. 그는 동점골을 넣었고, 싱가포르는 미얀마와의 다음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이후 공동 개최국인 베트남에 0-1로 패하였다. 싱가포르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주리치는 2012년 대회를 세컨더리 스트라이커로 시작하였으나, 미드필더 하리스 하룬이 부상을 당하면서, 왼쪽 측면의 첫 11인 엔트리에 차출되었다. 그는 디펜딩 챔피언 말레이시아와의 1차전에서 3-0으로 이긴 경기에서 세 번째 골을 넣었다. 말레이시아전 골로, 그는 대회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득점자가 되었다. 3일 후,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에 0-1로 패하였으나, 라오스를 4-3으로 꺾고 골득실차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준결승전에서 필리핀을 합계 1대 0으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싱가포르는 이어 결승에서 태국을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주리치는 대회가 끝난 후 53번의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해 24골을 넣으며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코치 경력

주리치는 선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 싱가포르 축구에서 감독직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2013년부터 탐핀스 로버스의 피트니스 코치로 재직하고 있으며, 뒷방 스태프로의 전환을 준비하며 전임으로 재직하고 있다.

사생활

세르비아계인 주리치는 도보이 근처의 리팍 마을에서 태어났다. 주리치의 아버지는 철도에서 일했고, 준프로 축구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1993년 8월 9일 포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2000년 62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다. 주리치에게는 밀란이라는 형이 있다.

주리치는 1998년 멜버른에서 아내 나타샤를 만났다. 그들은 2000년 1월에 결혼했다. 딸 이사벨라 니나(2002년생)와 아들 알레산드로 우고(2004년생)는 둘 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주리치는 싱가포르 홀랜드 빌리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의 엄격한 피트니스 체계의 일부로서, 그는 매일 아침 그의 이웃 주변을 15km씩 달린다. 그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밤늦게까지 하지도 않는다. 그는 칠리를 피하고 프라타, 닭고기 밥과 같은 기름진 음식 섭취를 제한하며, 비수기에 자신의 체력 관리를 유지한다.

축구 외에도, 주리치는 자선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0년 동안 어린이집에서 자원봉사를 해왔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린이집에서 아들 마시모 루카 몬티를 입양했다. 2011년에는 스탠다드 차타드 마라톤에서 라디오 디제이 몬테이로, 운동학자 탄 스웨 캉 박사와 함께 하프 마라톤 경주를 뛰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생츄어리 하우스를 위한 1만 2천 달러를 모금했다. 2012년, 주리치는 스트레이츠 타임즈 스쿨 포켓 머니 펀드를 위해 $2,657을 모으기 위해 12일 동안 택시를 운전했다. 그와 그의 세 아이들은 또한 2013년 9월 도버 공원 호스피스(Dover Park Hospice)를 돕기 위해 판매된 플라스틱 비둘기들을 그렸다. 그는 이것이 "싱가포르에 무언가를 돌려줘야 하는 의무"의 일환이라고 믿고 있다. 2014년 12월, 주리치는 국가범죄예방협의회와 싱가포르 경찰이 공동으로 조직한 델타리그의 초대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각주

  1. “Dobojlija – Najbolji Fudbaler U Singapuru”. 《Tipura.com》 (세르비아어). 
  2. Rick Olivares (2012년 7월 9일). “The changing tides of Aleksandar Duric”. 《Business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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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Duric: I just love football”. 《FIFA》. 2014년 4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3월 2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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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Najbolji golgeter na svijetu zapravo je bosanski kajakaš”. 《Klix》 (보스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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