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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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은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성장배경과 어린시절

카르타고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광산을 개발한 카르타고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여 로마를 두렵게 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의 실력을 두려워한 강경노선의 정치인이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몰락시켜야 합니다."라고 연설할 정도였다.[1]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했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젋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화가 충실히 되어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였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나 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장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험의 정도에서 한니발이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한니발의 리더십

한니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역사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한니발의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으로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에게 과학지식이 있었다고 본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식초를 갖고 다녔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서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 [1]

타키누스 전투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긴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 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늪지대 통과

다음해인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싸움터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남하하는 두 가도를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봉쇄하고 있었는대 한니발은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에 있는 늪지대를 통과한다. 이 늪지대는 수백킬로미터에 걸쳐 무릎까지 차는 물이 고여있었고 따라서 막사를 지어 병사들이 숙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않고 행군을 하였고, 이런 혹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또한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는다.

트라시메누스 전투

위의 혹독한 행군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서둘러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트라시메노 호숫가로 유인하는데 성공,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2만 7천 명의 로마 군인과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학살한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한 이후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법을 통해 한니발의 회전을 피하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싸움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칸나에 전투

다음해에 새로 선출된 바로와 파비우스 아이밀라누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에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아이밀리아누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에 겨우 5만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에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 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이나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 섬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한니발의 몰락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카르타고와의 전쟁의 의지가 강했고, 전쟁에 쓸 수 있는 인적 자원도 풍부한 상태였다. 또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하여 한니발이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스페인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형제들에게 사라고사에서 대패를 한다. 사르디냐 섬의 반란을 돕기위해 침공한 2만여의 카르타고 군은 주둔중인 로마군에 의해 전멸당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한니발이 직접 이끄는 병력에 거의 맞먹는 병력을 이끌고 있던 한노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베네벤툼에서 노예로 구성된 그라쿠스 군을 만나 의해 궤멸당한다. 칸나에 전투 이후 이들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당한 패배는 이미 칸나에에서 전사한 로마군의 수를 능가하였으며 이러한 패배는 한니발이 승기를 굳힐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전략

로마의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지구전은 보급을 방해하는 한편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군대엔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방법이였는데 이는 곧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 들 중엔 로마 장군들에 맞먹는 지휘관이 없었다.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 이후에도 이탈리아 중부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로마의 6개 군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쓸어버리는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한니발이 이렇게 싸우는 동안 로마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를 겹겹히 포위한다. 한니발은 이 카푸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주력부대로 한쪽 포위망을 급습하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물리친다. 이 포위를 풀고자 한니발은 생애 최초아지 마지막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해 보지만,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지 않았고 로마의 성벽은 상당히 견고하였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를 잃고 얼마 안있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도시도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다.

그 뒤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타렌툼마저 친 로마 성향의 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에 선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부임하여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를 완전히 격파하고, 카르타고 세력을 그 지역에서 내몰았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아있던 자신의 병력을 모두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에 진입하나, 한니발에 앞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목숨을 잃는다.

점점 전황이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되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인 칼라브리아로 쫓겨갔다.

스키피오의 전략

기원전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왔지만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더욱 우수하게 습득한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자마에서 싸워 완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자살

한니발의 아내, 시밀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던 동생, 하스드루발과 또다른 동생 마고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죽었으며, 자신도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아시아로 도망쳤다가 수년 후 공을 세우고 싶어한 한 로마인 백인대장이 자신을 찾는것을 알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셔 자살을 하였다. (기원전 183년)

함께 보기

각주

  1. 《과학으로 여는 세계불가사의 1 - 신과 미지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인간들의 이야기》2부 신화의 무대-8장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비밀의식 /이종호 지음/문화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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