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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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프랑스어: Marie-Nicolas-Antoine Daveluy,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 ~ 1866년 음력 2월 8일, 3월 30일 충청남도 보령)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이며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다.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와 함께 병인박해가 있을 때 순교하였으며, 1984년한국의 103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생애

신학교육

다블뤼 주교의 아버지는 공장을 소유했으며, 시 의회의 일원이었다. 그의 가족은 종교적인 경건함으로 유명하였다. 7세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7년 예수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블뤼는 1834년 10월 사제가 되기를 원하여 그의 고향 인근의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6년 그는 파리의 생 쉴피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841년 그는 본당 사제로 임명되었다. 1843년 10월까지 본당 사제로 사목한 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게 된다.

조선에서의 사목

1844년 그는 6개월의 여행 끝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 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상하이에서 작은 나무배를 타고 긴 여정 끝에 충청남도의 강경에 도착하였다. 다블뤼는 1846년 조선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2년 만에 17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지만, 아픈 와중에서도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국어-프랑스어 사전과 여러 천주교 서적을 집필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 순교사를 집필하고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페레올 주교를 이어 조선 교구장이 된 베르뇌 주교가 도착하자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주교 임명은 1857년 3월 25일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베르뇌 주교가 1866년 2월 순교하자, 다블뤼 주교가 23일간 조선교구장 역할을 하였다.

순교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그를 돕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체포되었다. 3월 14일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선교사(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는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심문과 고문을 받고, 한양에서 100km 떨어진 갈매못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왕이었던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갈매못에서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와 장주기, 황석두와 함께 참수되었다.

축일은 9월 20일(103위 성인)이다.

유해

3일 동안 시신이 바닷가에 방치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1866년 6월 중순,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순교자의 시신들과 함께 홍산의 석죽골로 이장하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여러번 옮겨졌다. 1882년에 나가사키로 옮겨졌으며, 1894년 5월 22일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다가, 1900년 9월 10일 명동대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시복과 시성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 때에 24인의 순교자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에 103위 한국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바깥 고리

가톨릭대사전

전임
베르뇌
제5대 천주교 조선교구
1866년 3월 8일 - 3월 30일
후임
리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