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3세 카에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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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6일 (월) 07:14 판
루트비히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로방스의 왕
부르군트의 왕
재위 901년 ~ 905년
888년 ~ 928년
888년 ~ 928년
전임 아르눌프
보소
보소
후임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르
위그
위그
이름
별호 맹인왕
신상정보
배우자 비잔티움의 안나

루트비히 3세(Ludwig Ⅲ) 또는 루티비히 맹인왕(Ludwig the Blind, 880년경 – 928년 6월 28일)은 프로방스의 왕 (887년 11월부터), 이탈리아 왕 (900년 10월 또는 12월부터), 901년부터 905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의 딸 이밍가르트의 와 프로방스의 보소의 아들이다. 또한 그의 고모 리첼다대머리왕 카를 2세의 후처였다. 프로방스부르군트의 군주로는 루트비히(루이) 4세이다.[1]

7세에 아버지 보소가 사망하자, 카를 3세의 보호를 받았고, 뒤에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그의 보호를 받았다. 890년에 프로방스 왕이 되고, 900년 프리울리 출신 롬바르디아의 왕 베렌가리오 1세에 반대하는 롬바르디아 귀족들의 추대로 10월 파비아에서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출되고 901년 2월 로마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4세의 축성을 받고 신성 로마 황제관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베렌가리오 1세와의 오랜 전쟁 끝에 905년 7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베렝가리오에게 포로로 잡혀 그에게 두 눈을 뽑히고 프로방스로 추방되었다. 그의 별명 맹인왕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생애

초기 활동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의 딸 이밍가르트와 프로방스부르군트의 제후로 서프랑크 왕국의 혼란기에 자립했던 보소의 아들이다. 왕비는 비잔틴 제국 황제인 레오 6세와 프랑크족 출신 아델라이드의 딸인 비잔틴의 안나(914년 사망)로, 899년에 결혼하였다. 또다른 아내 아델라이드는 북부 부르고뉴의 제후 콘라트 1세의 딸이다. 보소가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벨프 왕가 출신 부르고뉴의 제후 콘라트 1세는 재빨리 부르고뉴의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였다. 후에 905년 또는 914년 무렵 루트비히는 콘라트 1세의 딸 아델라이드와 결혼하게 된다. 이 사이에서는 루돌프(929년 5월 12일 사망)라는 이름의 아들이 태어난다. 또한 콘라트 1세의 여동생 아델라이드는 다시 루트비히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정의공 리샤르 오툉과 결혼하였다.

그밖에 루트비히에게는 어머니가 누군지 불분명한 샤를 콘스탄틴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후에 비엔나 백작을 역임했다.

프로방스 왕

887년 1월 11일 아버지 보소가 죽자 그는 프로방스의 왕이 되었는데 나이가 어려 권력이 불안하였다. 섭정으로는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와 삼촌 정의공 리샤르 오툉이 그를 대신하여 왕국을 다스렸다. 어머니 이르밍가르트는 아들과 함께 황제 뚱보왕 카를 3세에게 의탁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고,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의 사촌이었던 카를 3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으로 인정, 보호해 주었다. 또한 그에게 비엔나 백작의 작위도 내려주었다. 그러나 887년 11월 카를이 조카 아르눌프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888년 1월 카를이 죽자, 다시 카를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케른텐의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르눌프는 그가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하자 890년 루트비히를 아를, 프로방스 그리고 부르고뉴의 왕으로 인정해고 보호해 주었고, Visio Karoli Grossi를 작성하여 그를 카롤링거 왕가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랭스의 대주교 풀크에 의하면 901년 그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작성했다고도 한다. 894년 루트비히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었다.

루트비히는 치세 동안 내내 사라센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다. 896년 프로방스의 남부 해안가로 쳐들어온 사라센인 해적과 교전하였다. 898년에는 프락시네트 해변가로 올라오는 사라센 군사를 맞아 교전하였다. 같은 해, 루트비히는 아키텐을 방문했는데, 루트비히의 여동생 엔젤베르그(Engelberge)는 아키텐의 공작이자 레온, 마콘(Mâcon)의 백작인 경건한 윌리엄과 결혼하였다. 루트비히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레오 6세의 딸 비잔티움의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그의 전임자들을 대하듯 그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여겼지 로마 황제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이탈리아 원정과 황제 즉위

900년 그는 롬바르디아베렌가리오 1세이탈리아로 쳐들어 온 마자르 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루트비히는 베렌가리오 1세의 반대파 이탈리아의 제후들의 요청으로, 황제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의 손자의 자격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무능한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 아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은 황폐화되었다. 루트비히는 900년 10월 12일 파비아에서 열린 이탈리아 귀족회의에서 귀족들에 의해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베렝가리오의 군대를 무찌르고 900년 롬바르드족의 옛 수도인 파비아상 미셀 마조레에서 10월 12일 롬바르드의 철왕관을 수여받고 이탈리아 왕에 올랐다. 그는 계속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 베네딕토 4세에 의해 이듬해 2월 15일 또는 2월 22일에 축성받고 신성로마제국황제의 대관식도 치렀다. 그러나 902년 그는 베렝가리오에게 패하여 영원히 이탈리아를 떠나는 서약을 하고 프로방스로 물러났다.

904년 이탈리아를 재공략하여 롬바르디아의 북서부를 획득하였다. 905년 루트비히는 다시 이탈리아로 와 달라는 이탈리아인 귀족들의 제의를 받았다. 그에게 이탈리아 방문을 제의한 귀족들 중에는 이브레아 후작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1세도 있었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의 공략을 준비한다. 다시 한번 그는 파비아에서 베렌가리오 1세 군사를 물리치고 입성하였으며, 베로나 시와 주교 아달하르트(Adalard) 등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패배와 최후

905년 7월 그는 다시한번 이탈리아를 침공하는데 이번에도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을 받은 베렝가리오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베로나 시내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에게 위치가 노출된 그는 성 페트로의 교회의 성소 안에 숨었지만, 붙잡혀 베로나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7월 21일 그는 서약을 깬 죄목으로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별명이 맹인왕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황제의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카롤링거 왕조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고 실패로 끝났다.

프로방스의 당시 수도인 으로 돌아온 루트비히는 그후로도 몇 년간 프로방스를 통치했지만, 911년 이후 사실상 프로방스부르군트의 실권은 루트비히의 먼 친척이자 매제인 아를의 백작인 위그에게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장님으로 살았다. 위그는 루트비히의 여동생 윌라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로마 황제라 칭하고, 행동에 있어서 로마 황제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924년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들의 초빙을 받은 상부르고뉴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지했는데, 928년 아를의 위그에게 지위를 양도하였다. 루트비히는 928년 7월 5일 아를에서 사망했다.

가계

그의 아들 비엔나 백작 샤를 콘스탄틴의 어머니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석

  1. 루트비히 1세 경건왕과 그의 외할아버지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인, 그리고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인 사후 프로방스와 부르군트를 차지한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아들 루트비히 2세 말더듬이왕에 이어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군주로는 네번째 루이(루트비히)가 된다.

관련 항목

전임
카를 3세
프로방스의 왕
890년 - 928년
후임
위그
전임
카를 3세
부르군드의 왕
888년 - 928년
후임
위그
전임
베렝가리오 1세
이탈리아 왕
900년 - 905년
후임
베렝가리오 1세
전임
아르눌프
신성로마제국 황제
901년 - 905년
후임
베렝가리오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