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철: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19번째 줄: 19번째 줄:
}}
}}


'''문영철'''({{본명|문운경}}, [[1915년]] [[7월 25일]]~[[1952년]] [[9월 3일]])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권투 선수 겸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었던,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시절의 반공 청년운동가 겸 우익 사회운동가였다.
'''문영철'''({{한자|文英哲}}, {{본명|문운경|한자=文雲耕}} [[1915년]] [[7월 25일]]~[[1952년]] [[9월 3일]])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권투 선수 겸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었던,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시절의 반공 청년운동가 겸 우익 사회운동가였다.


어렸을 때에 병으로 부모를 여의며 고아가 되어 보통학교의 1학년을 중퇴하고 1922년에 홀홀단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1927년에서부터 이듬해 1928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만주]]의 [[지린시|지린]]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특사 등으로 활약한 후, 1928년 [[상하이시|상하이]]로 건너가 권투 선수로 활약을 한 후, 1941년 [[경성부]]로 귀국하여 1945년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후에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 시대부터 [[김두한]]의 친구이자 참모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에 병으로 부모를 여의며 고아가 되어 보통학교의 1학년을 중퇴하고 1922년에 홀홀단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1927년에서부터 이듬해 1928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만주]]의 [[지린시|지린]]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특사 등으로 활약한 후, 1928년 [[상하이시|상하이]]로 건너가 권투 선수로 활약을 한 후, 1941년 [[경성부]]로 귀국하여 1945년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후에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 시대부터 [[김두한]]의 친구이자 참모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2023년 9월 23일 (토) 16:13 판

문영철
신상정보
출생1915년 7월 25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김포군
사망1952년 9월 3일(1952-09-03)(37세)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사인공산당에 피살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직업권투선수 출신의 사회 운동가
종교개신교
188cm
배우자기독교 신자 아내 있었음
자녀문수영(아들)
활동 정보
활동 기간1927년~1952년
소속우미관

문영철(한국 한자: 文英哲, 본명문운경, 본명 한자: 文雲耕 1915년 7월 25일~1952년 9월 3일)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권투 선수 겸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었던,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 시절의 반공 청년운동가 겸 우익 사회운동가였다.

어렸을 때에 병으로 부모를 여의며 고아가 되어 보통학교의 1학년을 중퇴하고 1922년에 홀홀단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1927년에서부터 이듬해 1928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만주지린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특사 등으로 활약한 후, 1928년 상하이로 건너가 권투 선수로 활약을 한 후, 1941년 경성부로 귀국하여 1945년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후에는 미군정 시대부터 김두한의 친구이자 참모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5년 을유 해방 후 문영철은, 이승만 대통령의 귀국시 경기도 김포에서부터 서울 이화장까지 미군과 함께 많은 부하들을 비롯한, 조선의 팔도의 약 2만명과 더불어 차라리 무급 경호대장으로까지 활동하였다.

문영철은 1941년까지 일제강점기 시절 상하이 등지에서 권투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문영철은 해방 이후 김두한과 같이 우익 활동 등을 했으며, 아내를 따라 기독교로 귀의하였다.[1] 한국 전쟁이 발발 후 김두한, 김무옥, 김관철우미관패들과 함께 민간 종군원으로, 학도병을 이끌고 영천 전투를 거쳐 1952년 9월 3일, 경기도연천군불모고지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인민군 공산당에 맞아 향년 38세로 사망하였다.

문영철이 등장한 작품

각주

  1. 1956년에 《우미관》은 "문영철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전쟁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들에게 총살당했다"라는 궤설스러운 말을 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