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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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李自成, 리쯔청, 1606년 9월 22일 ~ 1644년)은 말기 농민군 영수이다. 본명은 이홍기(李鸿基, 리훙지)인 이자성은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생애[편집]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은 말기 증상을 노정했다.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기근이 들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데다가 후금군도 나날이 격렬하게 침공했다. 명장 원숭환이 침공하는 후금군을 늘 방어해 왔으나 후금의 홍타이지가 전개한 책략에 빠진 숭정제가 무고한 원숭환을 의심하여 죄를 물어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온몸을 칼로 잘라서 죽인 탓에 침공하는 후금군을 방어할 힘이 사라진 때 이미 백성을 규합하고 틈왕(闖王)이라 자칭한 뒤 전사한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으며, 그 농민군 세력이 북경에 육박했다.

숭정 17년인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명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33세였다. 숭정제가 죽으면서 명은 멸망했다.

1644년 5월 27일 후금의 도르곤은 명의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명의 도읍인 북경에 진입해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승계한 왕조라고 선포하였다. 동년, 만주족은 국호를 후금에서 으로 개칭했다.

북경에서 현재 섬서 상락시인 상주로 철수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이 계속 패퇴하자 많은 명의 유신(遺臣)이 남경에서 세운 남명이나 청에 투항하여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청에 동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도중에 병에 걸려 죽어서 그 천재일우의 기회는 안개가 걷히듯 흩어져 소멸되었다.

이자성의 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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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은 농민군 지도자 이자성이 일으켜 명나라를 무너뜨린 반란이다.

반란 발생[편집]

그때 당시 명나라 농민들은 청나라와의 잦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 황제 숭정제의 포악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천민 출신이었던 이자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명나라는 군대를 보냈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자성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카이펑시안을 점령했으며, 북경으로 진격했다.

명나라의 멸망[편집]

승승장구의 기세로 북경에 들이닥친 이자성의 반군을 막을 수 없었던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결국 황후와 딸을 죽이고 메이산 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이로부터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로써 명나라는 277년이라는 역사가 끝이 났다.

오삼계의 공격[편집]

그때 청나라군은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 때문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자성이 자신의 아버지와 애첩을 잡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에 투항했다. 결국 이자성은 40일밖에 황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도망갔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최후[편집]

우창강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현재 호북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퇴각하였지만, 구궁산(九宮山)에서 명에 충성하는 현지 무장 세력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실제 사정은,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자성은 자결하였다. 이자성이 사망하고 나서 대순의 농민군은 사망한 이자성을 위해서 구궁산 일대를 소탕하여 보복하고 남명과 연합하여 청에 계속 대항한 일변, 이자성 사망 후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자성이 탈출하여 후난 성의 현재 후난 성 상덕시인 석문(石門)에 소재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제설이 아직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