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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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 영력제(昭宗 永曆帝, 1625년~ 1662년) 또는 영명왕(永明王)은 남명의 제5대 황제(1649 - 1662)이자, 사실상 마지막 황제이다. 이름은 주유랑(朱由榔)이다.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사촌동생에 해당된다. 황제에 즉위 하기 전에는 영명왕의 지위에 있었다. 그의 사후에도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연호인 '영력'을 기년으로 하여 19세기에도 양반가나 공문에는 영력 연호를 사용하여 영력 200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1]

묘호는 소종(昭宗), 시호는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로 정성공이 추서하였다.

생애[편집]

1643년 명나라 말 혼란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에 도망갔다. 그 직후,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여, 계왕(桂王)이 된다. 1644년, 이자성의 반란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 하자, 당왕(唐王), 복왕(福王)과 협력하여 남명 정권이 성립되었다. 당왕이 청나라군에 잡히면서 조경(肇慶)으로 피하여 1649년 황제로서 즉위 하였고, 연호를 영력으로 하였다.

그 다음은 정성공의 협력하에, 한때는 광둥성으로부터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를 하여 통치하였다. 1650년 청나라군이 중국 남부 경동구이린을 함락시키고 1656년 주산열도를 점령하였다. 화남 각지를 방랑했다. 1659년 운남까지 차지하자 영명왕은 버마로 도주하였다. 이 때 영력제를 따른 가신은 불과 65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662년 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다. 청나라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왕에 의해서 청나라군에 사로 잡혔다. 영명왕은 살해되었고 이로써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나머지 명나라의 부흥군은 비정통인 정무제를 추대하고 2년간 청나라 군에 항전하였으나 그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돌연사하면서 명나라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사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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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은 그가 죽자 국상을 선포하고 애도기간을 가진 뒤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조선에서도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의 유림들은 사적으로 별실에 상청(喪廳)을 마련하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하기도 하여 이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이후에도 조선의 유림들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연호인 '영력'을 기년으로 하여 19세기에도 양반가나 공문에는 영력 연호를 사용하여 영력 200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가계[편집]

주석[편집]

  1. 조선의 각종 공문에서도 영력 기원, 혹은 전임자인 숭정제의 연호를 따서 숭정 기원으로 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간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전 임
경종 동무제
제5대 남명의 황제
1649년 ~ 1662년
후 임
평종 정무제
전 임
경종 동무제
명나라 황실 수장
1649년 ~ 1662년
후 임
평종 정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