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순 (1890년)
이원순
李元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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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행정관 직무대리 | |
임기 | 1934년 2월 15일 ~ 1934년 3월 2일 |
주석 | 이동녕 대한 임정 주석 |
총리 | 양기탁 대한 임정 국무총리 |
장관 | 김규식 대한 임정 외무총장 직무대리 |
차관 | 차이석 대한 임정 외무차장 직무대행 서리 |
상하이 주재 대한 임정의 구미외교위원회 총본부 외무부 외교위원 | |
임기 | 1943년 5월 31일 ~ 1945년 8월 15일 |
주석 | 김구 |
부주석 | 김규식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0년 10월 8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993년 4월 19일 | (102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경성 보성전문학교 |
경력 |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자유당 최고위원 겸 상임고문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전임교수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사장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회장 신민당 전임고문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명예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한미협회 명예회장 광복회 고문 백범기념사업회 고문 |
정당 | 무소속 |
본관 | 연안(延安) |
배우자 | 이매리 |
친인척 | 이희호(생질녀) 김대중(생질서) |
종교 | 개신교(감리회) |
이원순(李元淳, 1890년 10월 8일 ~ 1993년 4월 19일)은 한때 미국 영구거주권을 취득한 전력이 있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기업가, 정치가, 사회기관단체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해사(海史). 한성부 출생이다.
1914년 경성 보성전문학교 전문학사 학위 취득과 동시에 미국으로 망명,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93년에 별세하였는데 향년 104세였다.
이력[편집]
학력[편집]
독립운동[편집]
- 1914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법과 전문학사 학위 취득, 미국 망명,
- 1915년 대한독립단 미국 지부 회장(~1920)
- 1920년 대한인동지회 제2대 회장(~1943)
- 1929년 하와이주 태평양주보사 주필(`~1943)
- 1934년 상해 임정 재무부 주미제2행서 재무위원
- 1943년 상해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1945)[1]
- 1944년 1월 23일 미국과 협의, 3.1절 기념 경축 전시공채표 발행
- 1946년 한미무역회사 설립(뉴욕~1953)
- 1947년 한인이민위원회 위원장(~1952), 이때 한인이민법안을 미국국회에 통과시켰고, 대한올림픽위원회 한국대표 IOC에 한국을 회원국으로 가입시킴[1]
사회단체활동[편집]
- 1953년 한국독립당 외교행정안보특임고문(1953년 퇴임).
- 1953년 3월 1일 대통령표창 수상
-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 겸 상임고문(1953년 퇴임).
- 1953년 한국증권주식회사 사장~1967
- 1960년 동계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 단장[1]
- 1974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명예법학박사
- 197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 1982년 보관문화훈장 수상
- 1984년 한국시각장애자복지회 회장
- 1986년 자랑스러운 고려대인상 수상
- 1988년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한미협회 명예회장,
- 프리메이슨 33급 회원, 광복회 고문, 백범기념사업회 고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