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지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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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얀 지슈카의 기마동상

얀 지슈카(체코어: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얀 지슈카 즈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 1360년~1424년)는 체코의 장군이자, 후스파의 지도자로서, 얀 후스의 추종자이기도 하며, 부르주아에 속하는 가문 출신으로 보헤미아의 트로크노브에서 태어났다.

그는 Wenceslaus4세의 재임중에 일어난 보헤미아의 내전에 참가했다. 1378년에 연대기 작가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교황 비오 2세)의 기록된 공식적 기록에 따르면 지슈카라는 별명이 척안(隻眼)을 의미하며, 얀 지슈카가 한쪽 눈을 잃게 된 이유는 어린시절의 싸움 때문이라고 한다. 지슈카는 탄넨베르크 전투(그룬왈드 전투:1410년 6월 15일)에 참전하여 독일 기사단에 저항하여 라드진을 수비하였다. 그는 법정과 깊은 연관이 있는 어린시절을 보냈고, 소피아 여왕의 시종으로 들어가기도 했었다.

보헤미아의 종교적 분노가 1415년 얀 후스의 화형으로 최고조에 달했을때, 가톨릭군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이 보헤미아를 대상으로 결성되었다. 이에 지슈카는 보헤미아의 명예와 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얀 지슈카는 전술에 있어서 극도의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무수한 숫자의 농부들과 소작농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지슈카는 이 농부들을 그들이 전혀 소유하지 못한 칼과, 말, 갑옷으로 무장한 전통적인 병사로 바꾸려 하지 않고, 병사에 편입시켰다. 이같은 독립의 윤곽과 군사적인 사고는 가톨릭의 믿음을 실증적으로 바라보려 한 얀 후스의 사고와 나란히 중세와 근대를 이어주는 또다른 축이었다. 지슈카는 기존의 사고를 제쳐두고 전혀 다른 군단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많은 농기구들을 무기로 변환시키기 시작했다. 농업용 도리깨는 쉽게 무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농업용 마차를 수레진(Wagenburg)라 불린 그의 재치있는 전술에 이용하였다. 이 마차는 바퀴를 마주대어 세워놓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개척자들이 콘네스토가 웨건으로 만든 것과 같이 원을 이루었다. 말들은 이 울타리 안에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마차의 바깥 부분과 하부장치에는 날카로운 나무들과 병사들이 총을 쏠 수 있는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호에 따라서 마차는 당겨질 수 있었고, 이에 후스파 기병들은 전술적 조치에 따라 적의 측면을 기습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지슈카는 그의 군대를 이런 전술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켰으며 전장에서 깃발을 통해 신호를 알리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후스 전쟁은 또한 전장에서 총의 초기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 독일인들은 화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중 전술적 무기로 소량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평지에서 총병들은 단지 총을 한발 쏘는 정도로 말 위에 올라탄 기병에게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성벽의 뒤, 혹은 수레진의 담장 안에서 총병의 무리는 총의 위대한 잠재성을 일깨울 수 있었다. 체코인들이 총을 pištala라 부르고, 소형 대포를 houfnice라고 부르던 데에서 영어 단어 "Pistol"과 "howitzer"가 유래하였다. 탄네베르크의 경험에서, 지슈카는 그의 적들이 어떻게 공격해올지 정확히 알 수 있었고, 그는 적군을 격파하여 자신의 승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위대한 혁신자이며 군사적인 지도자로 여겨진다. 지슈카는 역사상 드믄 불패의 장군중 하나였다.

Mikoláš Aleš가 그린 후스파 장군 얀 지슈카.

지슈카의 이름은 후스전쟁이 시작된 1419년 후스파 사람들이 마을의 의원을 시청의 창문을 통해 내던진 것으로 시작된 제1차 프라하 공방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 전투에서 지슈카는 그 용명을 떨쳤다. 일시적인 휴전이 국왕 지기스문트의 열렬한 추종자와 프라하의 시민들 사이에 맺어졌을 때, 지슈카는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플젠을 행군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그 도시를 떠나 수도멜에서 지기스문트의 추종자들을 격파하고(1420년 5월 23일), 타보르에 도착하여 성장하는 후스파에 대한 새롭고 강한 지지를 확인했다.

독일의 왕이자, 헝가리의 왕이며, 보헤미아를 침공한 지기스문트가 그의 형제 벤체슬라우스의 후계자임로서 왕관에 대한 권한을 주장하는 동안, 슈카는 새로운 군사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 군사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인민의 4장군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지기스문트에게 협박을 받은 프라하의 시민들은 타보르에 구원을 간청하였다. 지슈카와 다른 장군들에 의해 지휘되던 타보르 군은 도시의 방위를 위해 입성하였다. 프라하에서, 지슈카와 그의 병사들은 오늘날, 프라하의 행정구역에 속해있으며 지즈코프에 있는 비트코프라고 알려진 언덕에 강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강한 독일군이 개방된 지형에서 후스파 공동체에 의해 방어되고 있던 비트코프의 진지로 돌격하였다. 지슈카의 영웅적 활약에 의해 이 공격은 분쇄되었고,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포위를 풀었다(얀 지슈카를 기리는 거대한 동상이 언덕의 정상에 세워져 있다. 이 상은 지슈카가 거대한 말의 동상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는 9미터, 혹은 27 피트 정도의 크기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1420년 8월 22일), 타보르군은 프라하를 떠나 타보르로 돌아왔다.

지슈카는 지기스문트의 추종자 중, 특히 강력한 로마파인 Oldřich II of Rožmberk와의 새로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지슈카는 언제나 승리했고, 이 투쟁을 통해서 후스파는 지기스문트가 떠난 보헤미아의 대부분을 소유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을 왕으로 선출하자는 의견이 제안되었으나 1421년 카슬라브에서 회동을 한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의회는 국가의 종교적, 정치적 정당에 의해 선출된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잠정적인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다. 카슬라브의 회의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 지슈카는 두 명의 타보르 대표 중 하나로서 선출되었다.

지슈카는 아담파라 불린 광신적인 분파의 반란을 빠르게 진압하였다. 그는 로마파와, 지기스문트의 추종자에 대한 그이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그가 받았거나 요구한 활약에 대한 보상중 유일하게 리토멀리스 근처의 작은 성을 점령하여 계속적으로 소유하였다. 후스파의 관습에 따라, 지수카는 자신의 새로운 소유물에 Chalice라는 성서적인 이름을 주고, 이후로 서명을 할 때 칼리스의 지슈카라 하였다. 후에 1421년, 그는 라비 성을 공략하던중 지슈카는 남아있던 한쪽 눈을 부상으로 잃었다. 이제 비록 완벽하게 맹인이 되었지만, 지슈카는 계속하여 타보르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Statue of Žižka in Tábor's town square (Žižka Square), J. Stachovsky, 1884.

1421년 말,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를 점령하고자 재침하였고, 지슈카로부터 쿠트나 호라의 중요한 마을의 소유권을 획득하였다. 마을의 대부분인 독일계 주민들은 소수인 후스파 사람들을 학살하고 성벽의 밖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지슈카에 대해 성문을 닫는 행동을 보였다. 타보르와 프라하 연합군의 최고 지휘자인 지슈카는 계략에 빠졌으나, 역사가들이 최초의 기동전이라 부르는 전략을 수행하려 하였다. 지슈카는 적의 봉쇄를 뚫고, 콜린으로 퇴각하여 증원을 받은 후 반격을 개시, 콜린과 쿠트나 호라와 콜린 사이에 있는 네보비디의 마을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1422년 1월 6일). 지기스문트는 1만 2천의 병력을 잃고 자신만이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Deutschbrod에 최후의 영채를 구축하였으나 체코군에 의해 격파당했고, 지슈카의 방법과는 반대로 이 곳의 수비자들은 검을 들었다.

1423년 초, 내전을 지휘하던 후스파 지도자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지슈카는 타보르 군의 지도자로서 호리스에서 4월 20일에 Utraquist의 귀족들과 프라하 군을격파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십자군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후스파들은 1423년 6월 24일 코노피스테에서 휴전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소위 십자군이 보헤미아에 입성하기도 전에 소멸되자,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의 공작 지기스문트 코리부트는 그의 일시적인 통치기간동안, 소위 Utraquist라고 불린 온건 후스파에 속해있던 밀렌티네크의 공작 보렉을 흐라덱 크라로브시의 통치자를 지명한 적이 있었다. 지그스문트가 떠난 이후에 민주파가 도시의 전권을 소유한 흐라덱 클라로브시는 보렉을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위해 지슈카를 불렀다. 지슈카는 이 요청에 응해 흐라덱 크라코브의 근처에 있던 스트라코브의 농장에서 보렉의 지휘하에 있던 Utraquist들을 격파했다(1423년 8월 4일).

지슈카는 이제 그의 오랜 적 지기스문트의 통치하에 있는 헝가리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비록 지슈카의 헝가리 공격은 헝가리 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이때 지슈카가 보여준 퇴각은 지슈카의 군사적 공훈중 하나로 평가된다. 1424년 내전이 보헤미아에서 다시 발발하고 지슈카는 1월 6일 스칼리스, 6월 7일 말레소브에서 프라하 인들과 Utraquist들을 완벽하게 격파한다. 9월 그는 프라하에 행군하고 이 달 14일 Utraquist로서 후에 프라하의 대주교가 되는 얀 로키카나의 설득으로 후스파간의 평화에 합의하게 된다. 후스파는 화해를 하면서 아직 지기스문트의 추종자에 의해 지배되는 모라비아를 공격해야 된다고 합의하고, 지슈카는 이 전역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라비아 공략도중 전염병으로 인해 프리비슬라브에서 1424년 10월 11일 사망하고 만다. 연대기 작가 피콜로미니(교황 비오 2세)에 따르면 지슈카의 유언은 그의 몸으로 드럼을 만들어서 그가 죽은 후에도 자신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많은 적들로부터 악마로 여겨진 맹인 장군에 관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신화이다. 지슈카는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군사들이 마치 그들의 아버지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아라 자칭할 정도로 뛰어난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

지슈카의 적들은 그를 두고 말하길 " 오직 신의 손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는, 필멸자로서를 물리칠 수 없는 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그에 대한 외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슈카의 전술은 정통적이지 않고, 혁신적이었다. 덧붙여 그의 군세를 훈련시키고 장비시키는 데 그들의 능력에 따랐으며, 그는 무장된 마차를 작은 대포와 총으로 무장하여 500년 후 나타날 탱크를 예견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군대를 훈령시키는 것 뿐 아니라 지형 지물을 이용하는 데도 달인이었다.

고찰[편집]

Jan Žižka in a detail of Jan Matejko's Battle of Grunwald

최근 체코의 문화와 종교 발달에 대한 얀 지슈카의 실제적 활동에 대하여 역사 연구가들의 주제로 몇가지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얀 지슈카가 자기 방어와 교회를 신에게 가까운 쪽으로 개혁하기 위해 싸운 현명한 지도자로 여겨져서만은 안 되며, 우리는 그를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살상하고 대량학살과, 교회와 마을을 태움으로써 체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파괴한, 물론 그의 적들이 단 한 사람도 살려주지 않은 데 비해, 종종 어린아이와 여자만은 살려준, 사람으로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극단적인 생각으로 여겨진다. 장군으로서의 시야에서 보면 다방면에서 출진하여 보헤미아를 노리는 십자군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지슈카는 그의 나라와 국민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적들의 경우 일말의 자비심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슈카는 가끔 자비심을 보이고, 이를 집행하기도 하였다. 네메르키 브로드에서 그의 군대가 불복종의 태도를 보인 후에, 지슈카는 그의 전군에 명령하여 신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비는 기도를 하게 하였다. 그 후에 얀 지슈카는 꼼꼼한 법률을 지어 전군은 물론,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볼 때, 얀 지슈카는 수세기 동안 만연한 단순하고, 피에 굶주린 전사가 아닌, 사려깊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얀 지슈카는 검의 사람으로서 신의 사람인 얀 후스의 반대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스전쟁을 다룬 오타카르 바브레의 서사 영화에서 두 사람은 체코의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연결된다.

참조[편집]

  • "The Hussite Wars", Count Lutzow, J. M. Dent & Sons London, E. P. Dutton & Co. New York 1909
  • "John Zizka & the Hussite Revolution", Frederick G. Heymann, Russell & Russell New York 1955, 1969.
  • "The Hussite Wars (1419-36)", Stephen Turnbull, Osprey Publishing (ISBN 1-84176-665-8)
  • "The Crusade Against Heretics in Bohemia, 1418-1437: Sources and Documents for the Hussite Crusades (Crusade Texts in Translation S.)", Dr Fudge.
  • "František Šmahel: Die Hussitische Revolution I-III (MGH-Schriften 43/I-III, Hannover,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