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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이란?[편집]

파독이란 1963년 12월 광부 247명을 필두로 하여 1977년까지 총 18,993명의 대한민국 광부와 간호사들독일에 파견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흔에서 겨우 벗어난 때였고 실업률은 28%에 달하여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독일과의 협정을 통해 광부 및 간호사 파독이 추진되면서 대한민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경쟁을 통해 선발되어 조국을 뒤로 하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 외로운 땅으로 떠났다. 파독 광부들은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1,000미터 지하 탄광 안에서 갖은 고생과 시련을 겪었지만, 동료들끼리 ‘글뤽 아우프(행운을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를 외치며 서로 희망을 잃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뎌냈다. 파독 간호사들도 타국에서 생활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에다가 언어적, 문화적 어려움 또는 인종적, 성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특히 당시 한국 여성들은 기본적으로는 미혼으로 이주를 했어야 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보다 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간호사로 파견이 되었는데 간호업무는 물론이고 화장실 청소, 환자들의 대소변 처리, 시체 닦기 등 간호업무 이상의 것들을 담당했다. 이러한 고된 상황 하에서 흘린 그들의 땀과 노고로 최초의 서독 재정차관이 이루어졌고, 그 후에도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 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데에는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오늘날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노력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소외되어 가던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1]

양국의 시대적 배경[편집]

1960년대 한국사회는 6.25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나 급속한 인구증가와 농업중심의 경제구조로 인해 실업률이 높았고 이는 곧 사회불안 요인이 되었다. 실업자들 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사회가 안정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부5.16군사 정변으로 성사 전에 중단되었던 서독으로의 근로자 파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외화까지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고학력자에 해당하는 고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20대의 젊은이들이 광부모집에 대거 몰렸다는 사실만으로도 60년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이고 특히 고학력의 젊은이들의 일할 수 있는 곳은 더더욱 희소했다. 특히 대학졸업자와 중퇴자 중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수 없는 막막함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암담한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품고 떠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1968년 10월 3일 한・독 정부간 ‘한국인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모집 요강’ 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정부 주도로 간호여성이 파독 되었다. 그리고 1969년 8월 ‘한・독 정부 간 간호원 진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다. 당시 한국에서의 간호원은 전문직으로 선망 받는 직업이었으나, 독일에서의 간호원은 대표적인 기피 직종에 속했다. 이는 당시 독일에서의 간호 업무의 특성에 기인하는데 간호원의 역할보다는 간병인의 업무에 가깝기 때문이다. 환자의 식사와 용변을 돕고, 환자 목욕과 옷 갈아입히는 일까지 간호원의 업무였다. 그러면서 주사 놓기, 간호 기록 작성 등 전문 간호 업무까지 도맡아야 했다. 이렇듯 독일에서의 간호원 업무는 노동의 강도가 높기 때문에 기피 업종이었고, 자국민이 간호원이 되기를 꺼려하여 제3국 의 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파견된 간호여성들은 성실함을 인정받게 되어 1976년까지 지속적으로 간호여성을 파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1957년부터 1976년까지 총11,057명의 간호여성들이 독일에서 “로투스 블루메(Lotus-Blume)”01가 되었다.[2]

파독의 정치, 경제적 의의[편집]

양국의 정치,경제적 이유[편집]

1960년대에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지향정책은 농촌 붕괴현상을 초래했다. 그 결과 막대한 실업(1963년 파독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실업난은 심각한 상태였고, 3년 계약의 파독광부들에게는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높은 수입이 보장되었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로 가기를 희망했다.)과 외화 부족현상(파독이 진행되던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1인당 GNP가 100달러를 훨씬 밑도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국정부는 광부와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의 해외송출을 추진했다. 반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다. 많은 취업의 기회가 보장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그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광부의 파견은 1963년 12월 16일 한국정부의 임시고용계획에 관한 한국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 간의 협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협정에 따르면 한국 광부의 파견조치는 “한국 광부의 탄광지식을 향상시켜 한국 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의 광부인력 부족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미국이 독일에게 요청했던 한국 재건지원의 약속 이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고자 했던 독일정부의 의도와 실업난과 외화획득을 위해 해외인력수출을 원했던 한국정부의 이해가 부합되어 이루어진 조치였다.[3][4]

파독의 사회, 문화적 의의[편집]

파독 광부 및 간호사에 의한 한, 독 간 민간교류와 문화접촉은 양국 국민모두에게 새로운 사회문화적 경험이었다. 일부 독일인들은 한국 광부 및 간호사를 통해 한국인 또는 동양인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파독 광부 및 간호사의 가족 또는 다른 한국인들도 이들을 통해 독일과 서구 사회의 문화를 좀 더 직접적으로 접했다. 특히, 파독 근로자에 의한 이질문화 접촉은 타국 파견 한국근로자들에 의한 것과 차이점을 보인다. 우선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기간은 기본이 3년으로, 타 지역 한국 파견 근로자에 비해 시간적으로 이질문화를 오래 접할 수 있었다. 다수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파독 초기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머물렀지만, 이것은 의무나 강제가 아니었으므로 일정기간이 지나면 주거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타 지역 진출 노동자들 예컨대, 중동의 한국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격리된 공동 생활권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해외취업의 규모에 비하여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화적 접촉과 교류에는 한계가 있었다. 현지 독일인과 한국인 사이의 직접적인 문화전파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현지 독일인들과 결혼하여 한,독 가정을 이루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사에 의하면 독일에 잔류하고 있는 간호사의 30%가 독일인과 결혼해서 현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해외취업을 통한 문화적 접촉과 교류는 현지인과의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 진출한 제3외국인들과의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서독에 취업한 광부와 간호요원들이 그곳에 진출한 다른 나라의 광부나 간호사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에 접할 수 있었다.[5]

파독이 독일의 간호 문화에 끼친 영향[편집]

1966년을 전후해서 간호대학 졸업자나 간호전문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격증가진 간호사들이 대규모로 독일로 갔다. 이들의 독일유입은 독일사회로 하여금 간호문화와 관계해서 매우 중요한 경험을 하게 했다. 이 경험은 독일의 간호문화를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이주 노동력이 독일 땅을 대거로 떠난 후에 간호교육의 질적인 고양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초에 간호대학이 만들어졌던 영미권의 간호제도와 문화의 영향 위에서 한국의 근대적 간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그런 이유에서 한국에서 간호사는 당시 한국 여성들이 받았던 교육의 정도나 사회적 인식 면에서 독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고급 직종의 전문직 의료인에 속했다. 이에 반하여 독일은 간호업이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특징이 비교적 강하고 직업으로서의 이미지가 다른 직업에 비하여 낮다. 탈 세속화와 간호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도가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간호는 종교적인 선행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직업적 전문성 보다는 육체적인 서비스업으로서 여성의 전용 직업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난한 나라에서 왔지만 업무의 전문성을 갖고 있던 한인 간호사와의 마주침과 업무능력에 대한 경험 속에서 독일사회에는 이전에 간호 인력이 하지 않던 일들이 간호업무에 추가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는 간호업무가 다양하게 분화되는 경향들로 이어졌다. 우선, 병동에서 좀 더 전문적인 일이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여성들 중심으로 맡겨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한인 간호 인력들이 그 일을 하는 경우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분화가 정확하게 한국인 간호인력 등의 출현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주노동의 등장과 전문적인 이들의 등장은 간호 인력의 부족을 겪고 있는 독일사회에 분화라는 현상을 가져왔고 그 분화는 전문 간호 인력의 능력발휘로 인해서 더 심화되었다. 이는 기존에 간호 인력이 했던 일 들 가운데 독립적인 직업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는 전통적인 간호업무 중에 청소나 빨래 등의 가사업무와 관련된 업무를 맡는 하나의 직업군이 생긴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간호사를 돕는 간호조무사제가 분업 과정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독일 간호 인력의 수준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전문적인 처치에 가까운 일들은 한국인 간호사들처럼,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주 간호 인력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고급교육을 받은 전문 간호 인력들이 있었지만 간호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독일인이 보기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적 변화 없이 질 높은 간호 서비스를 누릴 수 있었던 기회는 이주노동력들이 더이상 대규모로 유입되지 못하게 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상황은 독일 간호업 전반에는 긍정적인 시작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1973년 외국인 취업정책이 폐지되고 난 후에는 간호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됨과 함께 간호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그동안의 고민이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간호일이 현장의 변화와 요구 속에서 분업화되어지고 영미식의 교육을 받은 많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을 통하여 고급의 간호문화를 접하였던 사회가 이주노동력을 자국인으로 교체하게 되는 변화가 여기에 반영되어 있었던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인여성들의 전문적인 역량발휘의 경험들도 들어있다. 이들의 역량은 간호일의 분업화를 통하여 발현되었고 이들로 인하여 영미식 간호문화의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6]

파독이 한국 사회에 끼친 사회적 영향[편집]

비교적 대규모의 인력, 그것도 자격증을 갖춘 간호사를 독일로 취업시키면서 독일의 처사에 대한 대내외적인 비난과 호소, 한국 언론에서의 비판 등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전후 복구를 위해 한국이 외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그 일환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교육된 인력을 한국이 아닌 독일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파독이 한국 내 의료혜택의 수준을 악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국민보건과 건강, 요양의 사정은 한국 간호 상황의 혼란과 인력부족을 초래했다. 국민들의 의료적인 사회권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독일의 국가적인 의도와 시장의 사정은 “인력수출”을 통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려고 하는 한국의 국가적인 정책, 그리고 외국에서 삶의 개선을 꿈꿀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국경을 넘는 취업 러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한국의 간호업 주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의 한 가지는 간호 인력의 수가 증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에 없던 또 하나의 간호 관련 직업이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에서 의료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간호조무사 제도가 그것이다. 한국 내 간호인력 부족은 우선적으로 인원을 늘리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간호학교장들이 모여서 증원을 도모하고 우선적으로 간호학교 각 학년에 1학급씩 증설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한국에 부족한 인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독일로 보내는 인력을 늘리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독일의 고용조건의 변화에 따라 한국의 고용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1980년대 들어 한국사회에 나타난 간호 인력의 일자리 부족 현상이 그것이다. 독일에서 1973년에 외국인 고용을 중지하고, 그 뒤 약 3년간만 더 고용이 이루어지고 난 후 한국인 간호사의 자리는 독일 젊은이들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 때 한국인의 일자리가 되어주었던 독일노동시장의 변화로 그 자리를 메워주기 위해 이주했거나 교육되었던 인력들은 더 이상 일자리를 찾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일자리 부족을 더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업무의 정확한 경계가 정해지지 않고 만들어졌던 점은 오늘날에 이르러 업무와 직업적인 성격의 불분명함에 의하여 갈등이 이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7]

파독 한인들의 당시생활상[편집]

파독 광부의 당시 생활모습[편집]

  • 1964년 제 2진으로 갔던 한 광부의 일기

1964년 10월 8일 목요일(첫 출근의 날)구름, 비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공교롭게도 오늘이 나의 양력 생일날이다. 초, 중,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즐겨 쓰던 일기를 군대생활, 서울 막노동, 독일에 오기까지의 복잡한 과정 때문에 쓰질 못했다. 독일광부 지원에서부터 독일에 오기까지 거의 1년 동안 꿈같은 생활을 해왔다. 아직도 설레는 마음과 시간차 때문에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고국의 부모형제를 떠난 지가 3일이 되었다. 오늘부터 우리에게는 광산일을 하는 것이 현실로 시작되었다. 아침 6시에 우리 광부동료들은 일어나서 저마다 손수 식사를 준비하여 먹어야만 했다.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김치와 된장국을 대신하여 빵과 치즈를 발라 먹었고, 콩나물국 대신 독일식 수프를 끓여서 먹어야만 했다. 우리들은 아돌프 광업소에 6시 30분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 광부들은 각자 코드번호를 받게 되었다. 나의 광부번호는 1562번이었고, 열쇠를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초등학교 입학생과도 같은 기분이다. 군 입대 당시, 군번을 받았던 때가 다시 생각난다. 각자에게 곡괭이와 삽을 나눠주면서 작업을 시작하라고 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이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몸의 피로와 긴장은 계속되어 무척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음식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며, 주방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광부들이 각각 자기 나라의 음식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음식냄새로 메스껍고, 배는 많이 고프지만 입맛은 잃은 채 생활하고 있다. 배는 많이 고픈데 독일식당에서 주는 음식은 느끼하고, 고기를 많이 먹어보지 못한 나에게는 매일 고기가 나오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부푼 꿈과 흥분은 사라지고, 고통으로 바뀌었다. 날씨는 매일 매우 흐리고, 갑자기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었다 해가 났다, 비가 자주 오다 습기가 많고 안개가 가득히 끼어있다. 매일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오늘 처음 시작한 일이라서 많이 힘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꼭 해야만 하는 의무감 때문에 참아가면서 일을 해야만 했다.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 계속 소화가 안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독일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독일 국민성에 대하여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독일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놀랄 정도로 부지런하였다. 근무하는 동안 내내, 쉬는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독일인들은 지독하게 일을 한다. 매우 부지런하다.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거의 미친 사람처럼 부지런히 일만 하는 모습이었다. 출퇴근 때에는 자전거, 오토바이, 그리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오후 3시경에 퇴근하여 쌀밥이 먹고 싶어서 쌀로 밥을 하여 간장 하나로 2그릇을 먹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매우 답답함을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언어장벽과 문화차이로 3년간의 이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까마득하고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나의 모든 생활과 앞으로의 삶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밤 9시가 지났다. 내일을 위하여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자. 고국의 부모형제 안녕히 주무십시오.[8]

파독 간호사들의 당시 생활모습[편집]

그나마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이역만리 먼 곳에서 온 아시아 여성의 마음을 다 녹이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한국인 간호사를 배려하려는 독일인들의 작은 친절은 적지 않은 위안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 병원에 도착한 한국인 간호요원들은 오전, 오후, 야간반 등으로 나뉘어 격주 5일 근무를 했다. 야간반은 야간수당이 있고, 3주 근무하면 2주간 휴가가 주어지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는 게 파독 간호사들의 증언이다. 또 침대와 소파, 옷장, 찬장, 차테이블이 있는 기숙사에서 주로 생활했다. 여유가 생기면 한국 요리를 해 먹기도 했다. 당시 기숙사에 대한, 한 간호사의 기억이다.[9]

  • 한층 전체를 한국 간호사 15명이 전용으로 사용하고 한 개의 세면장에는 더운물과 찬물이 24시간 언제든지 나오고 샤워기와 좌,욕실이 한개 있는데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음.
  • 취사장이 한 개 있고 한대의 냉장고와 세 개의 곤로와 찬장이 세 개 있고 더운물 수도와 찬물 수도가 있고 전화가 있음.
  • 10조 다다미방 크기의 응접실에는 전축과 TV와 10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수도가 장치되어 있음.
  • 음악실에는 한 대의 오르간이 마련되었음. 재봉실에는 한 개의 재봉틀과 다리미대와 다리미가 준비되어 있음.
  • 빨래방에는 세탁기와 빨래줄 2개가 있음.
  • 두 개의 화장실에는 각각 세면대가 마련됐음.
  • 8조 다다미 크기의 방에는 한 개의 옷장과 책장 및 신장, 침대와 책상 그리고 2개의 의자가 마련되었고 냉온수가 나오는 세면대가 마련되어 있음.
  • 탁구대가 한 대 준비되어 있음.
  • 이것은 모두 한국 간호사들만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음

파독간호사의 근무환경[편집]

지역이나 병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 했지만, 간호사는 400~1200마르크, 간호조무사는 400~800마르크를 받았다. 간호사 가운데 60% 이상이 800마르크 이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적지 않는 임금수준으로 평가된다. 또 본업 외에 추가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벌기도 했다. 야간 근무조는 2주간의 휴가 기간에, 오전반은 오후 2시 근무 후에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꽃집 같은 곳에서 일하면 시간당 5마르크 내외를 벌었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에 본격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뒤따랐다. 대표적인 게 언어장벽과 외로움의 극복 등이었다. 첫 관문은 역시 언어 문제였다. 도착 후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이 좋으면 길게는 3개월까지 언어교육을 받은 뒤 배치되기도 했다. 철자와 기본적인 문법 정도만 공부했던 그들이 의사소통을 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빠른 경우는 3개월, 늦은 경우는 6개월까지 걸렸다고 한다. 그들은 근무가 끝나면 독일어를 공부했다. 기숙사에서 단어를 열심히 외운 뒤 다음날 병원에서 활용하기도 했고, 일부 간호사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하거나 아예 포크스호크슐레(국민대학) 같은 학교까지 다녔다. 말이 트이면서 독일 풍경과 문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독일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적응과 함께 가족과 고향, 조국 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커져갔다. 때론 동료들과 함께 수다를 떨거나 속치마 고무줄을 꺼내 고무줄놀이를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주말엔 일부러 한복을 입어보며 분위기도 바꿔보려 했다. 하지만 일부 파독 간호사들은 심한 향수병을 앓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질적인 생활문화를 몸에 익히며 소화시키느라 긴장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사이 사이로 '낯익은 모습' '귀에 익은 말습관된 익숙함'에 대한 그리움이 애타게 파고들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아! 이게 바로 그 향수병이라는 것이구나[10]
독일의 의료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의사가 지시를 하되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며, 병동 책임을 지는 '간호원 중심제'이다. 투약과 주사, 치료, 검사, 환자식사 등이 모두 간호사의 몫이었다. 의사의 지시를 받는 한편 간호조무사와 간호학생의 도움을 받아 이 같은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간호조무사는 임산부의 산전-산후관리와 검사, 신생아 돌보기, 환자의 체온과 맥박, 혈압측정 등을 하며 간호사의 업무를 도왔다.
다음은 산부인과, 산욕기 및 가벼운 수술환자 병동의 K간호사와 외과수술환자 입원실의 O간호사의 일과이다.[11]
  • (K간호사)
7:00~7:30 침상 정리 및 국부처치
7:30~7:45 얼음찜질 및 시험용 배뇨
7:45~8:00 아침 처방약 투약
8:00~8:15 환자 아침식사 준비(관장시킬 환자가 있으면 제외)
8:20~9:20 간호사 아침 식사
9:30~10:20 주사 및 다리 마사지(알코올과 연고)
10:20~11:10 혈압 측정 및 기록
11:10~11:30 낯 처방약 투약
11:40~12:00 환자 점식 준비
12:00~16:00 휴식
16:00~18:00 재 얼음찜질 및 알코올 마사지, 오후 주사처리 및 밤 처방약 투약(대체로 오후는 한가한 편)
18:00~18:30 환자 저녁준비
19:00~20:00 국부처리 등이 끝나면 기숙사 귀가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 휴일
  • (O간호사)
7:00 출근
7:00~8:00 침상정리
8:00~8:30 시험실에 보낼 피 뽑고 혈침
8:30~9:30 간호사 아침 식사
9:30~10:30 정맥주사 준비 및 근육주사 처치, 얼음찜질 주머니 마련
10:30~12:00 수술환자 회복기에 전신욕 및 좌욕하고 국부처치 및 주사부위 및 다리 마사지
12:00~12:30 환자 점식식사 준비
12:30~13:00 점심 체혼 측정
13:00~16:00 휴식
16:00 출근하여 침상 정리하되 수술환자일 때에는 수술환자의 일반상태 점검
17:00 수술환자 일반상태 및 정맥주사 준비 및 맥박과 체온 측정
17:30 저녁식사 마련
18:00 의사 회진하고 진찰하는 데 조력
19:00~20:00 변비약과 수면제를 원하는 환자에게 약품 투여
20:00 퇴근
한국인 간호요원이 1960, 1970년대 독일 사회에서 '연꽃' '천사' 등으로 불리며 호평을 받기까지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고단한 간호사 업무는 도리어 애교수준이었고 되레 간호 업무가 아닌 화장실 청소 등 잡일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물론 일부는 소아과 등에서 곧바로 간호사로서 근무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파독 간호사에게 어린이를 돌보는 일은 비교적 수월했다. 수준 높은 독일어도 구사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업무 자체가 정감이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 간호요원은 정식 간호사나 간호조무사였지만 처음엔 주로 '잡일'을 했다. 주로 언어가 서투르다는 이유에서다. 침대와 복도 청소, 환자 목욕 등. 투약과 주사치료, 검사 등 고유 업무를 주로 익혀온 그녀에겐 엄청난 고통이었다. 당시 파독 간호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수길 박사에 쏟아진 각종 편지였다. 이 박사에 따르면, 600여명을 파독시킨 이 박사가 받은 요청서가 무려 365통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기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또 일부는 이 박사의 사무실로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12]파독광부들이 3년 계약만료이후 체류허가가 여장되지 않았던 점과는 달리, 파독간호사의 경우 독일병원과 양로원의 요청에 의한 계약기간연장에 의해 독일에 장기간 체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용연장은 5년 이상의 거주자에게 제공되는 무기한 체류허가와 8년 이상 거주자에게 부여되는 영주권의 획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파독간호사의 독일영주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또한 독일에 남은 파독광부들은 이들 파독간호사들과의 결혼을 통해 독일영주를 보장받았고 이를 통해 독일 내 한국인의 수를 증가시켰으며 이는 곧 한인공동체의 발전을 가져왔다.

파독 노동자들의 현재행적[편집]

전체 파독 광부, 간호사 중 40%는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다른 40%는 유럽 내 타국으로 이주했고 남은 20%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현재 재독한인 장애협회 회원 대다수가 파독 광부, 간호사일 만큼 파독노동자들은 최근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파독노동자분들은 대부분 한국에 가고 싶어 하지만 한국의 부족한 의료 보험시스템 때문에 독일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남 남해군 독일마을이 2001년 설립되어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 중이다. 그들은 아직까지 한국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돌아온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하지만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가 아닌 남해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독일에 있는 자식들은 연세가 있으신 부모님들의 건강 걱정이 앞서고, 파독 노동자분들도 독일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파독 노동자 대부분은 연세가 60세가 넘었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를 접하는 시점에서 한국에 가도 이방인이고 독일에서도 이방인이라 여기서도 저기서도 한스러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런 마음들을 위로하기 위해 ‘동행’이라는 호스피스 단체가 설립되어 파독노동자들을 심적으로 돌봐주고 있다. 보통의 파독노동자들은 독일에 오기 전 자신들의 부모세대에게서 배운 교육방식을 채택하여 자녀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파독노동자 2세들이 병원 경영자, 독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의사, 작가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리더로 활동 중이다.[13]


출처[편집]

  1. 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광부 백서』, 2009
  2. 김창일, 『남해의 보석 물건마을』, 2013.7.10. 451~452쪽
  3.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연구, 2011
  4. 송태수, 『파독 30년의 역사는 차라리 눈물이다』, 월간 사회평론 길, 1995.10
  5. 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광부 백서』, 2009, 281~282쪽
  6. 나혜심, 트랜스내셔널 관점에서 본 독일한인간호이주의 역사: 양국 간호문화에 대한 영향을 중심으로, 2013, 대한의사학회 의사학 제22권, 제1호, 191-192쪽
  7. 나혜심, 트랜스내셔널 관점에서 본 독일한인간호이주의 역사: 양국 간호문화에 대한 영향을 중심으로, 2013, 대한의사학회 의사학 제22권, 제1호, 205-206쪽
  8. 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광부 백서』, 2009, 147~148쪽
  9. 이수길, 『한강과 라인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다』, 지식산업사, 1997, 157~158쪽
  10. 조국남, 「파독간호사의 눈물29」, 시민의 신문, 2002.08.26, 22면
  11. 이수길, 『한강과 라인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다』, 지식산업사, 1997, 156~157쪽
  12. 이수길, 『한강과 라인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다』, 지식산업사, 1997, 155쪽 참고
  13. MBC. “MBC 다큐스페셜,파독광부 50주년 특집-파독 그 후, 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