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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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태종
Song Taizong.jpg
북송의 제2대 황제
재위 976년 ~ 997년
황후 숙덕황후,의덕황후,명덕황후,원덕황후
부친 선조
모친 소헌황후
이전 황제 태조
다음 황제 진종
묘호 태종
시호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예열대명광효황제(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睿烈大明廣孝皇帝)

송태종 조광의(宋太宗 趙匡義, 939년 6월 7일 ~ 997년 5월 8일)는 중국의 오대 십국 후주의 무관이자, 송 황조의 제2대 황제(재위: 976년 ~ 997년)이다. 송태조 조광윤의 친동생으로 후에 형과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을 꺼려하여 '빛 광'으로 바꿔서 광의(光義)로 사용하다가 즉위를 하고 나서 경(炅)으로 고쳤다.그의 재위 기간 동안 송나라 지배체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송태조 조광윤의 적장자들을 제치고 그가 제위에 오른 것은 조광윤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기도 했고, 재위기간 내내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위 3년 만에 그는 양쯔 강(揚子江) 유역과 그 이남에 남아 있던 독립 제국인 오월(吳越)과 북한(北漢)을 정벌하고 소국들을 정벌하여 979년 당나라 멸망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생애[편집]

태조후주의 장군이었던 때부터 항상 형에게 협력하고, 보조하였고, 진교의 변으로 태조를 옹립할 때도 조보(趙普) 등과 함께 중심이 되어 태조를 설득하였다.

태조가 사망하고 나서 아들이 후사를 잇지 않고 태종이 즉위한 것에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다만 급사를 하고 양위를 받은 것에 대해 암살설도 사라지지 않았다. 후에 태조의 장자 조덕소(趙徳昭)가 자살하고, 둘째 아들 조덕방(趙徳芳)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적장자의 황위 승계에 엄격한 북송에서는 형인 태조의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준 것에 대해 항상 규탄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즉위 초 그는 자신의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는 관료들을 해직하고 유배보냈다. 단 사대부와 비판을 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는 태조의 유지를 이어 그들을 처형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에게는 태조에 뒤지지 않는 수완이 있었고, 979년 태조가 통일하지 못하고 남긴 오대십국 중의 오, 월, 북한을 멸망시켜, 태조의 업을 잇고 중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남긴다.

황제 즉위[편집]

요나라 정벌[편집]

거란족의 요나라 정벌은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바친 이후의 중국 군주들의 숙원사업이었고, 조광윤 역시 북벌을 계획하던 중 급서했다. 즉위 초, 태종은 북한의 영토였던 베이징[北京]과 만리장성 사이에 위치한 연운16주(燕雲十六州)는 당시 거란족이 세운 요(遼:947~1125)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태종은 979년 5월 연운16국도 수복하고자 병력을 징발, 태원을 출발하여 요나라에 원정군을 보내지만, 대패하고 만다. 처음에는 두 개의 성을 손쉽게 공략하였지만,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을 공략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본인도 화살을 맞고 상처를 입었으며, 무주공산이 된 지휘부를 대신하여 태조의 장자인 조덕소를 황위로 옹립하기 위한 움직임도 이 상황에서 발생하였는데, 결국 조덕소의 자결로 이 사태는 마무리 된다.

내정 개혁[편집]

993년 토지를 둘러싼 귀족들의 갈등이 깊어져 순화 4년 봄에 왕소파, 이순 등의 농민들이 쓰촨에서 봉기하였다. 원정으로서는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내치는 착실하게 이뤄 과거시험으로 문관을 대거 채용하고, 감찰제도를 갖추어, 당시까지 군인정치의 폐해로부터 문치주의로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즉위 초부터 한림원의 학사들에게 영을 내려 당나라[1]의 행정관제를 연구하도록 명하였는데, 지방 행정제도에서는 당나라의 1주1진제(一州一鎭制)를 답습하였다. 이는 각지에 확대된 각 군의 개편과 최고사령관직의 축소를 의미한다. 또한 전국을 15로로 나누어 각 로에는 행정장관인 전운사(轉運使)를 파견했다. 또한 전운사는 황제가 직접 임명하거나 중앙에서 파견하도록 하고, 각 로 전운사들과 절도사들의 업무를 감독, 관리하기 위해 어사를 비밀리에 수시로 파견하였다. 태종의 재위 말년에는 송의 지배체제가 확립되었고 문화적·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21년의 통치기간이 지난 997년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들이 제3대 황제 진종(眞宗)으로 계승, 등극했다. 능호는 영희릉(永熙陵)이다.

가족관계[편집]

  • 황후(정비) : 숙덕황후 윤씨(淑德皇后 尹氏)
  • 제 1계비 : 의덕황후 부씨(懿德皇后 符氏) (941 ~ 975)
  • 제 2계비 : 명덕황후 이씨(明德皇后 李氏) (960 ~ 1004)
  • 추존황후 : 원덕황후 이씨(元德皇后 李氏) (943 ~ 977)
    • 장남: 한공헌왕 원자 (漢恭憲王 元左) (965 ~ 1027)
    • 3남: 수왕 덕창(항)(壽王 德昌(恒)) 송 진종

기타[편집]

형과의 갈등[편집]

조광윤이 데려온 후촉의 후궁 서씨의 그 재능과 미모는 조광윤과 그의 동생인 조광의가 서로 질투하여 다투게 만들었다[2]고도 한다. 서씨와 함께 포롤 잡혀오고 맹창이 죽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조광윤은 재빨리 서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노여록》(爐餘錄)에 의하면 '촉주가 죽자 곧 태조의 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동생 조광의도 이 재색을 겸비한 서씨를 노리고 있었다.[2]

서기 976년 겨울 조광윤이 임종이 가까워 침대에 누워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조광의는 서씨에 대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밤중에 조광의는 형 조광윤을 몇번이나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서씨를 희롱했다. 조광윤이 일어나 이를 알고 분노하여 옥부(옥으로 된 도끼)로 바닥을 내리쳤다.[2] 놀란 황후와 태자가 왔을 때는 이미 임종이 가까워져 있었고, 조광의는 슬그머니 자신의 관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광윤은 세상을 떠난다.[2]

조광윤 독살설[편집]

979년 11월 북송 태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일각에서는 조광의가 친형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의혹은 그가 정통이 아니라는 설과 함께 그를 괴롭혔다.

기타[편집]

송태조에게 복수를 다짐했으나 실패한 화예부인은 자결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조광의가 화예부인을 제거했다고도 한다.

야사에 의하면, 그는 서씨가 수도로 압송되어 왔을 때부터 형이 그녀에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자 매우 불만이 많았는데, 수차례 걸쳐 간하였으나 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씨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조광의는 제위에 오른 뒤 서씨와 함께 사냥하러 갈 기회를 만들어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3]는 것이다. 활시위를 팽팽히 당겨 짐승을 겨누다 돌연 화예부인에게로 화살을 돌려 한 발에 죽였다[3]는 것이다.

관련 항목[편집]

관련 자료[편집]

  • 송사(宋史) 권1 태조본기(太祖本紀)
  • 송사(宋史) 권4 태종본기(太宗本紀)
  • 《노여록》(爐餘錄)

주석[편집]

  1. 특히 당태종과 당현종의 정책
  2. 샹관핑, 중국사 열전 후비:황제를 지배한 인물들(한정민 역, 달과소, 2008) 403페이지
  3. 샹관핑, 중국사 열전 후비:황제를 지배한 인물들(한정민 역, 달과소, 2008) 404페이지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