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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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내전이란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의 종족전쟁으로 르완다 사태라고도 불린다.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질병, 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배경 [편집]
당시 르완다는 이 지역에 진출한 소수 14%의 투치족이 왕국을 세워 토착부족인 85%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그 후 1919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지배하고 투치족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종족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벨기에는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다스렸으나 벨기에가 물러간 후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과정 [편집]
1959년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국왕 므와미 키게리 5세는 망명을 하고 1961년 1월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립 후에 많은 투치족이 쫓겨나자 1963년 이웃나라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여 이에 대한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결국 1973년 투치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후투족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이에 후투족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살아남은 투치족들이 이웃 나라 우간다로 도망쳐 1990년 우간다로 망명한 사람들 5,000명이 르완다애국전선(RPF)를 결성해 르완다를 침략했다. 1992년 후투족 정부와 RPF와의 협상으로 1993년 8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아루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루샤 조약은 범과도정부를 요구했으나 과도 정부는 성립되지 않았고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앙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고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이 사고는 르완다 대통령 경호대의 소행으로 밝혀져 이튿날 1994년 4월 7일 대통령직을 대행하던 아가트 우윌링기이마나 수상과 많은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이 RPF에게 살해당하고 그 후 수개월 동안 군대와 대통령 경호대, 극단적 후투족 민명대가 20~50만 명에 달하는 투치족 민간인을 살해했다.
1994년 7월 4일부터 투치족이 반격을 하여 수도 키갈리를 함락시키고 RPF는 키갈리에서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했다. 이에 수도 키갈리에 갇힌 6만 명의 후투족 민간인들이 반군의 보복이 두려워 탈출하기 시작했고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인 부타레와 후투족 최후 거점인 기세니까지 진격하자 후투족들이 피란을 떠났다.
후투족들은 키갈리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진 임시정부의 잠정 수도 기타라마시로 가거나 서북부의 국경을 넘어 콩고민주공화국 등지로 피란을 갔다. 피란 중 300만 명의 후투족 난민이 발생했고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의 전염병으로 많은 피란민이 사망했다.
한편 RPF는 7월 말에 전투 중지를 선언했고 후투족 난민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에 다시 르완다로 돌아왔다.
Film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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