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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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일) 18:10 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틴어: Flavius Josephus 플라위우스 요세푸스[*], 고대 그리스어: Φλάβιος Ιώσηπος 플라비오스 이오세포스[*], 기원후 38년 경 ~ 100년 경)는 기원후 1세기유대인 정치 선동가이자 역사가이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 군을 이끌다가 로마 군의 포로가 된 후 정보를 제공해 주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풀려나 로마 시민이 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이름은 새로 로마 시민이 된 이들에게 적용되는 관례에 따라 보호자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가문을 이름을 따 '플라비우스'를 가문이름(nomen)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름

요세푸스가 그리스어 저서에서 사용한 이름은 '이오세포스 마티우 파이스(Ἰώσηπος Ματθίου παῖς)'→마티아스의 아들 이오세포스이다. 요세푸스는 아람어도 구사하였고 거의 확실히 히브리어도 구사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의 이름이 이들 언어로 적힌 것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리스어에서 사용한 이름에서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요세프 벤 마티탸후(יוסף בן מתתיהו), 아람어로 번역하면 요세프 바르 마티탸후(יוסף בר מתתיהו)이다.

생애

요세푸스는 직접 지은 《유대 전쟁사(Ιουδαϊκός Πόλεμος)》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문에서 자신을 "마티아스(마티탸후)의 아들 이오세포스(요세프), 예루살렘의 사제(Ἰώσηπος Ματθίου παῖς ἐξ Ἱεροσολύμων ἱερεύς)"로 소개하고 있다(I.3). 그는 66년-73년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갈릴리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는데 정확한 경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67년 7월 갈릴리에 침공한 로마군에 투항하였다. 전쟁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전쟁에 관해 로마군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했다. 로마군은 베스파시아누스 플라비우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가 지휘했는데 둘 다 이후에 황제가 되었다. 69년 풀려난 요세푸스는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70년 예루살렘 포위 당시 유대 군과의 협상에 참여한 듯하다.

요세푸스는 71년에 티투스의 수행자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시민이 되었다. 또 베스파시아누스의 옛 저택에 머무는 배려를 받고 점령당한 유다이아의 땅과 상당한 연금도 지급받았다. 요세푸스의 알려진 저작들은 모두 로마에 있으면서 플라비아누스 가문의 보호를 받을 때 저술한 것이다.

70년경 요세푸스는 첫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여성과 혼인하여 플라비우스 히르카누스(Flavius Hyrcanus)라는 아들과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다른 아이를 포함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75년경 다시 이혼하여 세 번째 혼인으로 플라비우스 유스투스(Flavius Justus)와 시모니데스 아그리파(Simonides Agrippa)라는 아들 둘을 낳았다.

요세푸스의 생애는 모호한 점이 많다.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전쟁 당시 갈릴리에서 동료들과 같이 자살하지 않고 로마 군에 투항한 점, 포로가 된 후에는 로마 군과 협조한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요세푸스를 배반자 및 밀고자로, 그의 저술은 로마의 선전물 내지는 자기 변호로 보고 그의 역사가로서의 신용을 평가절하해왔다.

그러나 로마 시대, 특히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유대 문화에 대한 중요한 변명자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애국적이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보았다. 교육받은 이방인들에게 유대교를 옹호하고 추천하기까지 했으며 그리스-로마 사상과의 호환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대 문화가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유대인들을 문명화되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철학적인 민족으로 그렸다.

저작

  • (약 75년) 유대 전쟁사 (약칭 JW, BJ or War)
  • (?) 하데스에 대한 그리스인과의 대화
  • (약 94년) 유대인의 고전성 (AJ, AotJ or Ant. or Antiq.)
  • (약 97) 아피온에 반대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CA)
  • (약 99)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삶. 또는 자서전 (Life or Vita)

역사적 중요성

요세푸스의 저서를 통해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사해 사본과 연관지어서 2차 성전기 이후의 유대교 신학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요세푸스에 대한 연구는, 그와 바리새파와 관련성에 주목했다. 전통적으로 그는 바리새파에 속하면서도 나라를 판 변절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신진 학자들에 의해 현대적인 요세푸스 상이 형성되었다. 이는 그가 어느정도는 바리새파이며,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역사가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1990년 이후 현대의 연구는 그가 바리새파라기보다는 사제계급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1].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해 역사적인 인물과 단체, 관습과 지리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성서 외적인 사실들도 제공한다. 일례로 히브리 대학의 에후드 넷저는 요세푸스의 저술을 연구하여, 35년동안의 실패 끝에, 헤롯의 무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요제푸스가 기록한 것과 일치하는, 예루살렘에서 12킬로미터 남쪽에 떨어진 헤로디움 언덕으로 가는 길의 사막 평지의 터널과 물웅덩이 속에 있었다.

오랫동안 요세푸스의 고대 그리스어 원전은 소개되지 못했고, 불완전한 라틴어 번역에 의존했다. 1544년에서야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아놀드 알레니우스에 의해 그리스어 원전이 출판되었다. 이 그리스어본은 1732년 영역본으로 번역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그 문서를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얻을 수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는 한국어판으로도 출판되었는데, 전집형태로 출판하였다.

읽어 보기

주석

  1. Cf. Steve Mason, Todd Beall, and Ernst Gerl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