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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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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관'''(優美館)은 1912년 12월 경성부 종로구 관철정 89번지에 한국인을 상대로 만들어진 영화상영관이다. 하야시다 킨지로라는 일본인에 의해 세워졌지만 1910년 한국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던 [[경성고등연예관]]이 없어지면서 [[우미관]]은 그 공백을 메우게 되고, 단성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인 관객을 독점하는 극장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단성사]], [[조선극장]]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이름난 영화상영관이었다.
개관당시 [[극장]]은 2층 벽돌 건물에 1,000명 가량이 관람할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으로 들어차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 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무성영화와 활동사 등 상영하여 [[8·15 광복|8 · 15 광복]] 때까지 [[단성사]], [[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일류 개봉극장이었으나 [[1959년]]에 [[화재]] 때문에 [[화신백화점]]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대]]부터는 이류 재개봉극장으로 명맥만 유지되다가 여러번 영업정지 등으로 적자운영에 시달려 [[1982년]] [[11월 30일|11월 말]]에 폐업하였다<ref> {{뉴스 인용

개관당시 [[극장]]은 2층 벽돌 건물에 1,000명 가량이 관람할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으로 들어차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 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발성영화도 북촌에서 가장 먼저 상영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흥행사가 영사기까지 가지고 와서 1928년 봄에 [[우미관]]에서 흥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1929년, 우미관을 뒤이어 경쟁극장이었던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함께 발성영사기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설립초기에는 운영상의 미숙함으로 인해 여론의 지적을 받았는데, 그 중 변사의 언행이 무례하다거나 직원들의 행동이 거칠어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중부경찰서]]로부터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국 및 유럽의 명작을 많이 상영하였던 [[우미관]]은 1916년 12월부터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영화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게 돼 관객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다. 1913년부터 1921년까지 9년 동안 [[1천4백7편]]의 영화를 사영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서울에 있던 극창 총 상영편수의 50% 이상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영화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기세가 점점 꺾이게 된다. 극장 소유주와 임대자 간의 권리 다툼으로 분쟁에 휘말리고 운영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저회사인 [[쇼치쿠]]나 [[도호]]영화사의 배급라인에서 제외되면서 제대로 영화프로그램을 수급하지 못할 정도로 침체의 길을 겪었다. 무성영화와 활동사 등 상영하여 [[8·15 광복|8 · 15 광복]] 때까지 [[단성사]], [[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일류 개봉극장이었으나 [[1959년]]에 [[화재]] 때문에 [[화신백화점]]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대]]부터는 이류 재개봉극장으로 명맥만 유지되다가 여러번 영업정지 등으로 적자운영에 시달려 [[1982년]] [[11월 30일|11월 말]]에 폐업하였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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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1일 (토) 13:24 판

1959년 화신백화점 옆으로 옮기기 전 우미관의 모습

우미관(優美館)은 1910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1910년에 한 일본인에 의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고등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1915년우미관으로 개칭되었다.

개요

우미관(優美館)은 1912년 12월 경성부 종로구 관철정 89번지에 한국인을 상대로 만들어진 영화상영관이다. 하야시다 킨지로라는 일본인에 의해 세워졌지만 1910년 한국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던 경성고등연예관이 없어지면서 우미관은 그 공백을 메우게 되고, 단성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인 관객을 독점하는 극장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단성사, 조선극장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이름난 영화상영관이었다.

개관당시 극장은 2층 벽돌 건물에 1,000명 가량이 관람할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으로 들어차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 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발성영화도 북촌에서 가장 먼저 상영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흥행사가 영사기까지 가지고 와서 1928년 봄에 우미관에서 흥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1929년, 우미관을 뒤이어 경쟁극장이었던 단성사조선극장이 함께 발성영사기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설립초기에는 운영상의 미숙함으로 인해 여론의 지적을 받았는데, 그 중 변사의 언행이 무례하다거나 직원들의 행동이 거칠어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중부경찰서로부터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국 및 유럽의 명작을 많이 상영하였던 우미관은 1916년 12월부터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독점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영화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게 돼 관객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다. 1913년부터 1921년까지 9년 동안 1천4백7편의 영화를 사영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서울에 있던 극창 총 상영편수의 50% 이상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영화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기세가 점점 꺾이게 된다. 극장 소유주와 임대자 간의 권리 다툼으로 분쟁에 휘말리고 운영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저회사인 쇼치쿠도호영화사의 배급라인에서 제외되면서 제대로 영화프로그램을 수급하지 못할 정도로 침체의 길을 겪었다. 무성영화와 활동사 등 상영하여 8 · 15 광복 때까지 단성사, 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일류 개봉극장이었으나 1959년화재 때문에 화신백화점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대부터는 이류 재개봉극장으로 명맥만 유지되다가 여러번 영업정지 등으로 적자운영에 시달려 1982년 11월 말에 폐업하였다[1][2][3][4].

주석

  1. “우리나라 최초의 映畵館(영화관) 優美館(우미관) 없어진다”. 동아일보. 
  2. 송용회 기자. “우미관”. 네이버 이용. 
  3. 한국영화사학회.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4. 유인경,김의경. 《박노홍의 대중연예사1》. 연극과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