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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9일 (일) 17:34 판

윤근수
출생1537년
사망1616년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시호는 문정(文貞).
학력1558년 별시문과에 급제
직업문신, 정치가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아버지 윤변, 어머니 현씨
친척형 윤두수, 조카 윤흔, 윤방, 윤훤, 윤우, 종손 윤신지


윤근수(尹根壽, 1537년~1616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며, 서인(西人)의 일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는 자고(子固), 는 월정(月汀), 시호는 문정(文貞)이다.[1] 윤두수의 동생이다. 윤치호의 9대 방조이기도 하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고,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사후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이었다.

생애

1537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다음,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562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역임하였다. 1562년 조광조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였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63년 8월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두수, 박소립, 기대승 등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연루되어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의 상계(上啓)로 인하여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두수가 이조전랑 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재 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를 역임하였으며,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성균대사성에 승진, 이듬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하였다.

이어 경상도감사·부제학·개경유수·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 大明會典全書》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벌어진 동인서인의 싸움인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인해 형인 윤두수와 함께 관직을 삭탈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 문안사(問安使),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겸하며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이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사후 의정부영의정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하여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

  • 《사서토석》(四書吐釋)

가족 사항

사육신과의 관계

윤근수의 고조부 윤연령, 고성박씨 내외는 사육신 박팽년과 인척관계였다. 윤두수의 증대고모 윤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형 박대년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사육신이 화를 당하면서 박팽년의 형수인 윤씨는 봉석주 집의 노비로 제공되었다. 그런데 봉석주가 윤씨에게 자신의 첩이 되기를 원하자, 윤씨는 봉석주의 첩이 되었다.

주석

관련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