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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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1701년]])는 조선의 왕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여흥 민씨|민]](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이다. [[민진후]],[[민진원]],[[민진영]]의 누이였다. [[조선 숙종|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1701년]])는 조선의 왕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여흥 민씨|민]](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이다. [[민진후]],[[민진원]],[[민진영]]의 누이였다. [[조선 숙종|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부덕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희빈 장씨]]를 투기하여 [[영빈 김씨]]의 입궐을 주선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를 불러다가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생애==
==생애==

2011년 5월 29일 (일) 16:59 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1701년)는 조선의 왕 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이다. 민진후,민진원,민진영의 누이였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부덕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희빈 장씨를 투기하여 영빈 김씨의 입궐을 주선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를 불러다가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생애

그녀가 태어날 때 집안에 광채가 났다고 하며 출산직후에 향긋한 향기가 났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큰아버지 민정중은 그녀가 너무 아름답고 착하여 일찍 사망할 것이 염려되었다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뽑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張氏: 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원자 정호 사태

1688년 후궁 장씨(소위 장희빈)가 아들 (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복위

그러나 6년 후인 1694년 다시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한 후(갑술환국/4월 1일), 민씨는 환궁 비망기를 받아(4월 9일), 환궁한 뒤(4월 12일) 왕비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민씨가 복위된 뒤 숙종의 명으로 왕세자 균이 민씨 아래로 입적된다.

말년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서거한다. 민씨 사망 후 숙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민광훈
  • 할머니: 이씨, 이광정의 딸
  • 아버지: 민유중(閔維重)
  • 어머니(전모(前母)): 해풍부부인(海豊府夫人) 이씨
  • 어머니(생모):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
  • 어머니(계모): 풍창부부인(豊昌府夫人) 조씨:
  • 남편: 숙종
    • 양자: 경종 (갑술환국으로 모후가 희빈으로 강등되자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3]

기타

서예의 재주에도 능하여, 한글로 된 편지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의 전각 궁녀가 그를 가련히여겨 쓴 인현왕후 전이 유행하였는데, 한글로 쓴 소설이라 여염집을 통해 쉽게 보급되어,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 조성에 기여했다.

인현왕후를 연기한 배우들

주석

  1. 민진후는 은진송씨 소생이다. 근거:한수재선생문집 중 여양부원군문정민공신도비명, 약천집 중 동춘선생묘지문추지 外
  2. 민치구의 고조부
  3. 경종기록

함께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