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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0일 (화) 13:02 판

이억기
출생1561년
사망1597년
칠천량 해전
사인전사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경수(景受), 시호는 의민(毅愍).
학력선조조 무과
직업무신, 군인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이경수
친척양녕대군(5대조), 이순신(10촌)

이억기(李億祺, 1561년~1597년)는 조선 중기의 왕족 출신 무신(武臣), 군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는 경수(景受), 시호는 의민(毅愍)이다.[1] 전라우도수군절도사이순신, 원균, 권율 등과 함께 왜군 수군과 교전 중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부당한 명령을 받고 출정했다가 전사했다. 사후 완흥군(完興君)에 추봉되었다. 선조의 종친이며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의 5대손이다.

그의 가까운 친척인 이순신 역시 임진왜란 당시 군관으로 출정했다가 전사한다.

생애

이억기는 왕족으로 1561년 양녕대군의 4대손 이연손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무예가 뛰어났으며 17세 때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이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경흥부사(慶興府使),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여 북방의 여진족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무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1591년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元均)과 연합함대를 구성한 뒤 조선 수군의 기동타격군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일본 함대와의 여러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 정부와 원균의 무리한 공격 명령을 받고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여 최호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이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었다. 의민(毅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의민공(毅愍公)이 되었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연관인물

주석

  1.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61_1_001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