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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기인으로도 유명한데, 평안 감사 시절에는 한 통인(심부름꾼) 아이의 성이 이씨라고 하자 몹시 이상해했다. 알고 보니 그 통인 아이는 길에서 주워다 기른 아이였다. 허목은 통인 아이에게 생부를 찾아 주고는, 생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효도하라고 말했다.<ref name="sugeun" />
허목은 기인으로도 유명한데, 평안 감사 시절에는 한 통인(심부름꾼) 아이의 성이 이씨라고 하자 몹시 이상해했다. 알고 보니 그 통인 아이는 길에서 주워다 기른 아이였다. 허목은 통인 아이에게 생부를 찾아 주고는, 생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효도하라고 말했다.<ref name="sugeun" />


== 가족 ==
* 아버지 허교(許喬)
* 조부 허강
* 증조부 [[허자]](許磁)



== 저서 ==
== 저서 ==

2009년 10월 9일 (금) 20:49 판

허목 초상

허목(許穆, 1595년~168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및 학자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1], 호는 미수(眉)이다.

동시대의 정치가 우암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다.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와 외조부인 임제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2]


생애

허목은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의 심기를 거슬러 나라에선 그에게 평생 과거를 못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산림에 묻혀 글만 읽다가 효종 때에 56세 나이로 말단 벼슬인 능참봉이 내려졌고 그 후 80세에는 정승까지 올랐다.[3]

예송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을 주장하였으며,[4]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체이부정, 정이부체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5]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1675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을 사사했다.[6]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7]


일화

허목은 송시열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어느날 송시열이 중병이 들어 아들을 허목에게 보내 약을 지어오게 했는데, 그 약 중에 비상(독약)이 있었다. 이를 본 송시열의 아들은 비상을 버렸는데, 그 때문에 송시열의 병이 더 중해졌다. 송시열의 아들은 허목에게 가 새로 약을 받아 왔고, 송시열은 병이 나았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송시열은 아들을 꾸짖고는 허목에게 사과하러 갔다.

허목은 기인으로도 유명한데, 평안 감사 시절에는 한 통인(심부름꾼) 아이의 성이 이씨라고 하자 몹시 이상해했다. 알고 보니 그 통인 아이는 길에서 주워다 기른 아이였다. 허목은 통인 아이에게 생부를 찾아 주고는, 생부모와 양부모 모두에게 효도하라고 말했다.[3]


가족

  • 아버지 허교(許喬)
  • 조부 허강
  • 증조부 허자(許磁)


저서

  • 《기언(記言)》
  • 동사(東事)》

주석

  1.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2. 윤홍식·오병문, 2006,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
  3. 윤승운, 《우리 겨레 위인이야기》2권, 웅진.
  4.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40~241쪽.
  5.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41쪽.
  6.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50~251, 262~264쪽.
  7.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60~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