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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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설명|고려 [[충렬왕]] 때인 [[1275년]] [[국자감 (고려)|국자감]]을 개칭하여 국학이라 하기도 했다.}}
'''국학'''(國學)은 [[682년]]([[신문왕]] 2년)에 [[유교]] 진흥책의 하나로서 설립된 [[통일신라시대]]의 교육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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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8일 (수) 11:15 판

국학(國學)은 682년(신문왕 2년)에 유교 진흥책의 하나로서 설립된 통일신라시대의 교육 기관이다.

경덕왕 6년(747년)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으며, 경덕왕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776년) 때 다시 국학으로 고쳤다.

여기서는 3과(三科)로 나누어 경의(經義, 경서), 즉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문선(文選)》,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가르쳤다. 학생은 15~30세의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까지였다.

통일신라의 지배 체제가 성숙해짐에 따라 유교 이념의 교육과 관리 양성의 필요성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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