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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일 (목) 07:14 판

송 휘종
북송의 제8대 황제
재위 1100년 ~ 1125년
전임 철종
후임 흠종
신상정보

송 휘종(宋 徽宗, 1082년 11월 2일 ~ 1135년 6월 4일)은 북송의 제 8대 황제(재위 : 1100년 ~ 1125년) (佶)이다. 제6대 황제 신종의 아들이자 철종의 동생이다. 예술 방면으로는 북송 최고의 한 사람이라고 손꼽힌다.

생애

즉위 초

송나라신종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1100년 2월 형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채로 25세의 일기로 붕어하자, 황제로 즉위한다. 중신들은 다른 황태자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바랐지만, 황태후 흠성헌숙황후 상씨(欽聖憲肅皇后)의 뜻에 따라 휘종에게 권좌가 넘어갔다. 치세 초에는 온건한 신법파로 황태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증포를 중용했고, 증포는 신법과 구법 양파로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신법과 구법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점진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하지만 신법파의 채경 등의 책동에 의해 증포는 실각하고 채경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휘종은 뛰어난 문인으로 문인들과 시로 화답을 했으며 회화에도 조예가 깊었으나[1] 황제로서의 능력은 문인의 재능에 한 치도 미치지 못했다. 즉위 초 휘종에게 자식이 없을 때, 도성 동북쪽의 지세를 높여야 한다는 한 도사의 말에 흙산을 쌓아올리자 잇달아 자식이 생겼다.[2] 휘종은 이에 계속해서 흙산을 쌓아올려 10여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만들고[2] 정원 조성에 이용할 큰 암석들과 백성들을 동원하여 밀게 한 나무를 남쪽의 대운하를 사용하여 운반하게 했다(화석강). 또 예술 활동의 자금 만들기를 위해,채경이나 내시 동관 등을 등용하고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했다.신종, 철종 때는 왕안석의 신법을 이용하여 국가재정을 건전화 시켰지만 , 휘종은 그것을 스스로의 사치를 위해 이용했다. 토지를 측량할 때에는 기존보다도 짧은 길이를 이용하고, 그것에 의해 발생한 잉여 논밭을 강제적으로 국고에 편입하거나, 매매계약서가 애매한 토지를 몰수하는 등 무리한 수단도 취했다.이와 같은 악정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한은 높아져서, 방랍의 난이라고 하는 농민 반란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 지도자의 중에는 산동에서 활동한 송강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모델로 하여 탄생한 것이 명대의 소설 수호전이다.휘종은 채경과 동관 외에도 허위 군공을 세운 왕불, 향락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온 양사성(梁師成)과 이언(李彦), 기화와 괴석을 많이 모아온 주면 등을 총애하였는데 이들은 사람들에게 육적(六敵)으로 불리며 지탄받았다.[3][4]

정강의 변

1121년(선화 3년),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맹약에 의해 요나라를 공격했지만, 송나라는 방랍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강남에 출병 중이었고, 휘종 자신의 결단력도 부족해 요나라에 대한 출병이 지연되었다. 다음해 겨우 송나라는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천조제가 있는 연경을 공격했다. 송나라 군대는 연이어 패배를 당하고, 성과를 올릴 수 없자 송군의 지휘관 동관은 금에 원군을 요청. 해상의 맹에 의해 금나라는 장성 이남에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송나라의 요청에 의해 출병하여 순식간에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맹약대로 연운16주 중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었지만, 금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연운 16주의 백성들도 금나라로 이주시켰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는 세수를 징수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또한 금은 연경 출병의 대가로 은 20만냥, 비단 30만 필, 전 100만관, 군량 20만석을 요구했고, 북송은 이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25년(선화 7년), 송나라는 연운16주의 일부 반환에는 성공하였지만, 금에 점령된 나머지 주의 탈환을 계획하고, 요나라의 패잔군과 몰래 금을 합공 하기로 획책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금에 발각되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송나라로 출병하는 사태를 초래한다. 당황한 휘종은 자기칙당(自己則當)(사직서와 같은 것)을 내어 퇴위하고, 장남인 황태자 조환(흠종)을 즉위시켜 태상황이 되었다. 금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봉에서 탈출했지만, 흠종에 의해 되돌아 오게 되었다.

1126년(정강 원년) 금나라는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은 동시에 금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정강의 변).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한편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고종)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남 임안에 남송을 건국하여 송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최후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 부자는 오국성에 보내졌다. 휘종은 1135년 생을 마감하고 그 아들 흠종은 1161년 생을 마감하였다.

예술가로서의 휘종

문인, 음악가, 화가로서 휘종의 재능은 높게 평가되며, 송대를 대표할만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책의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4대가라 일컬어지는 소철, 황정견, 채양 등의 4사람을 열거하는데, 휘종과 그의 재상이던 채경도 포함될 수 있다. 휘종은 수금체(瘦金體)라고 칭해지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고, 광초(狂草)라는 초서체에도 능했다.[1] 회화로는 사실적인 원체화를 완성하여 풍류천자라고 칭해졌다. 특히 산수화와 화조화에 정통했으며 인재의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휘종 대에 송나라 회화는 크게 발전했다.[5] 휘종은 도화박사원(圖畵博士院)을 설립하고 당시에서 따온 구절로 그림을 그리게 하여 궁중화원을 뽑았으며 그 규모도 크게 늘렸다.[6] 또한 진궁(眞宮), 오악관(五岳觀)을 짓고 용덕궁(龍德宮)을 개축하여 화원들에게 그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6] 현재 휘종의 친필은 극히 귀중한 문화재가 되어 있으며, 일본에 있는 도구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음악에 있어서는 대악에 큰 뜻을 품고 쇠퇴한 아악을 정비하기 위하여 음률에 밝은 위한진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제례음악인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창시하였다. 더불어 악제개혁을 단행하여 태상시에서 관장하던 예와 악을 분리시키고 악은 새로이 설립한 대성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이러한 대성아악을 고려 예종에게 전해주기도 하였다. 그 외 희곡, 바둑, 축국 등에도 능했다.[1]

존호, 시호, 묘호

존호는 대부분이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1117년 4월 경에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로 올렸고, 1123년 7월 쯤에 계천흥도부문성무예명황제(繼天興道敷文成武睿明皇帝)라는 유교적 시호를 따로 올렸다.

사후 시호는 성문인덕현효황제(聖文仁德顯孝皇帝)이며, 1143년에 시호를 가상하여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7]로 추시되었다. 묘호는 휘종(徽宗)이며, 원래 능은 영고릉(永固陵)이나 영우릉(永佑陵)으로 개칭하였다.

가족

휘종은 북송의 황제 가운데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31명, 딸이 34명이었다.[8] 요절한 자녀를 제외한 대부분이 정강의 변 때 금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다.[8]

황후

  • 현공황후 왕씨(顯恭皇后 王氏, 1084년 ~ 1108년, 재위 : 1100년 ~ 1108년)
  • 현숙황후 정씨(顯肅皇后 鄭氏, 1079년 ~ 1131년, 재위 : 1111년 ~ 1125년) - 휘종이 태상황으로 물러난 후에 태상황후로 물러남.
  • 현인황후 위씨(顯仁皇后 韋氏, 1080년 ~ 1159년) - 원래 작위는 귀비(貴妃). 사후 고종에 의하여 황후로 추존.
  • 명달황후 유씨(明達皇后 劉氏, ? ~ 1113년) - 원래 작위는 귀비(貴妃). 사후 휘종에 의하여 황후로 추존.
  • 명절황후 유씨(明節皇后 劉氏, 1088년 ~ 1121년) - 원래 작위는 안비(安妃). 사후 휘종에 의하여 황후로 추존.

후궁

부인(夫人)
  • 의숙귀비 왕씨(懿肅貴妃 王氏, ? ~ 1117년)
  • 대귀비 왕씨(大貴妃 王氏)
  • 소귀비 왕씨(小貴妃 王氏, 1092년 ~ 1127년)
  • 귀비 교씨(貴妃 喬氏, 1081년 ~ ?)
  • 현비 양씨(賢妃 揚氏, ? ~ 1115년)
  • 숙비 최씨(淑妃 崔氏)
빈(賓)
세부(世婦)
어처(御妻) - 법외(法外). 외명부 작위 이용

황자

(이 외에 황자들은 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기록미상.)

황녀

정강의 변 전후(前後)로 요절하거나, 생년 미상인 황녀들

각주

  1. 청위, 장허성, 《중국을 말한다 11》 이원길 역, 신원문화사, 2008, p.168, ISBN 978-89-359-1450-0
  2. 청위, 장허성, p.174
  3. 청위, 장허성, p.181
  4. 박덕규, 《중국 역사 이야기 9》, 일송북, 2005, p.149~p.150, ISBN 978-89-5732-051-8
  5. 청위, 장허성, p.172
  6. 시앙쓰, 《황궁의 성》, 미다스북스, 2009, p.561, ISBN 978-89-89548-82-9
  7. 퇴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공손할 손’(遜) 자가 들어가 있다.
  8. 청위, 장허성,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