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 조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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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북송 태조]]의 후손인 '''조천혁'''(趙天赫)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북송 태조]]의 증손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에 봉해졌다.


== 역사 ==
== 시조 ==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중국 [[북송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임천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201_513_0503}}</ref>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중국 [[북송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임천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201_513_0503}}</ref>


== 인물 ==
임천 조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성종]](1474년) 때 문과에 급제하고 [[갑자사화]]에 연루된 11세손 '''[[조지서]]'''가 있다.
* 11세손 '''[[조지서]]'''는 [[조선 성종]](1474년) 때 문과에 급제하고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
* [[조정만]]


== 함께 보기 ==
== 함께 보기 ==

2014년 11월 4일 (화) 20:28 판

임천 조씨 (林川 趙氏)
관향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시조조천혁 (趙天赫)
집성촌대전광역시 서구
충청남도 홍성군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주요 인물조지서, 조정만
인구(2000년)11,040명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북송 태조의 증손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에 봉해졌다.

시조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중국 북송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임천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1]

인물

함께 보기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