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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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金台瑞, ? ~ 1257년 6월 10일)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 김봉모(金鳳毛)의 아들이며, 김경손(金慶孫)의 아버지이다.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생애[편집]

김태서(金台瑞)의 경주[1]사람으로 세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2]

아버지 김봉모(金鳳毛)는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고, 여진어와 한어에 통달하여 매번 금(金)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여, 항상 동각에 거처하였다. 신종때 추밀원부사에 임명되고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죽으니, 사흘 간 조회를 멈추었다.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3]

과거에 급제한 후 명종(明宗)·신종·희종(熙宗)·강종(康宗)·고종(高宗)의 다섯 왕을 섬겼으며[3], 1232년(고종 19)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진(文振) 등 31명에게 급제를 준.[4] 이후, 관직이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 門下侍郞平章事)에까지 올랐다가,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 하였다.[3]

그 뒤에 '오승적(吳承績)의 사건에 연좌'되어 집이 적몰(籍沒)되었으며, 1257년(고종 44) 졸하였다.

인품·일화[편집]

그는 비록 유학을 업으로 삼았지만 글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남의 토전(土田)을 무리하게 빼앗으니, 매번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막고 호소하며 말하기를,

“공(公)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들의 생계를 빼앗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장남 김약선(金若先)이 최이의 사위였기 때문에 유사(有司)에서 감히 탄핵하지 못했다.[3]

가족 관계[편집]

  • 고조 : 김한공(金漢公) : 공부시랑
  • 증조 : 김경보(金景輔)[5] : 북면도감판관
  • 조부 : 김세린(金世麟)[5], 초명 김작문(金作雯)[6], 수사공 상서좌복야
    • 아버지 : 김봉모(金鳳毛, ? ~ 1209년) : 추밀원부사, 문하시랑평장사, 정평공
    • 어머니 : 미상
      • 부인 : 병부상서·보문각학사·지제고 민식(閔湜, ? ~ 1201년)의 딸[7]
        • 장남 : 김약선(金若先) : 추밀원부사, 장익공
        • 차남 : 김기손(金起孫, ? ~ 1268년) : 문하시랑평장사·판이부사
        • 자부 : 행주 기씨 기필선의 딸
        • 3남 : 김경손(金慶孫, ? ~ 1251년) : 추밀원부사
          • 손자 : 김신(金信) : 밀직승지
          • 손부 : 판태부감 윤번(尹璠)의 딸
          • 손자 : 김혼(金琿)

각주[편집]

  1. 후대에 후손들이 전주 김씨 시조로 모시고 있다.
  2. 《고려사》에는 김알지의 후예라 한다.《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의 후예라 한다.
  3. 『고려사』 「김태서전」
  4. 『고려사』 「선거지」
  5. 『김봉모 묘지명』
  6. 『김경보 묘지명』에 기록된, 아들 이름이다.
  7. 『씨족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