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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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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監營)은 조선시대 때 각 지역의 관찰사(觀察使)가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1] 조선에 감영은 모두 8곳이 있었으며, 17세기 초에 이르러 감영 장소가 고정되었다.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한다.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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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영(監營) : 조선시대 각 도의 수부(首府, 최고 행정관청)
  • 관찰부(觀察府) : 1895년 시행된 23부제 시행에 따른 각 부의 최고 행정관청 (기존 감영을 대체)[2]
  • 관찰도(觀察道) : 1906년에 기존 관찰부 명칭을 관찰도로 개칭 (관찰부 명칭도 관례적으로 계속 사용됨)
  • 도청(道廳) : 일제강점기 중이었던 1910년 10월 1일 이후 각 도의 최고 행정관청[3]

8도 감영의 위치 및 건물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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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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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의 최고 통치자인 관찰사는 임기 2년으로 해당 읍의 수령을 겸직한다. 감영 관아의 일반적인 배치구조는 관찰사의 영역이 중심을 차지하고 부속 관원들의 실무처와 비관원 실무 행정관료들의 영역으로 구별된다. 감영 입구인 포정문에서 관찰사가 서무를 집행하는 선화당까지는 중문(重門) 또는 삼문(三門)으로 건물 구조가 구성되어 권위를 상징하며, 감영 전체 배치구성의 중심축을 담당한다.[4]

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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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의 재정은 관둔전(官屯田) 20결과 늠전(廩田) 80결, 공수전(公須田) 15결로 충당한다. 감영에 소속된 노비는 450명이고,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은 지역에 따라 차등을 두어 배속하였다. 서울에 있었던 경기 감영에는 1명, 충청도 19명, 경상도 39명, 전라도 19명, 강원도 22명, 황해도 19명, 평안도 11명, 영안도(함경도) 6명이다.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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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당시 국왕이 직접 임명한 감영의 수장으로 오늘날의 도지사이다. 호칭은 영감(令監), 감사(監司) 도백(道伯), 방백(方伯), 도수(道首) 등으로 불렸다. 관찰사는 국왕의 임명하에 각 도의 행정사무와 병무, 법무, 농무, 교무 등을 책임졌으며 각 도에 속한 지방관아 수령들에 대한 감찰과 명령을 내리는 권한도 갖고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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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관찰사는 주로 감영에서 업무를 수행하나, 관찰사의 보좌관인 종5품 도사(都事)와 구역을 나눠서 정기적으로 자신이 담당하는 도의 각 고을을 순회해야 했다. 이를 순력(巡歷)이라 하며, 1년에 2차례 시행되었다.
  2. 23부제 시행 당시에는 관찰부가 아닌 그냥 '부(府)'로 호칭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지역 명칭을 붙여 인천부, 동래부 등으로 불렀다. 또 이듬해 1896년에 13도제가 시행된 이후의 각 도의 최고 행정관청에도 감영이 아닌 관찰부라는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역시 감영 호칭 전례에 따라 도 명칭을 붙이거나 청사가 소재한 지역의 명칭을 붙여 호칭하였다. 예를 들면, 경기관찰부 또는 수원관찰부, 경상북도관찰부 또는 대구관찰부 등이다.
  3. 1910년 9월 30일에 일본국 칙령(勅令) 제357호 '조선총독부지방관 관제'가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관찰도가 도청으로, 관찰사가 도장관(道長官)을 개칭되었다. 도장관은 1919년에 도지사로 다시 개칭된다.
  4. 경상감영, 평안감영은 문이 2개인 중문 체제, 기타 나머지 감영은 문이 3개인 삼문 체제로 되어 있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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