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사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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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kytera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5월 20일 (수) 23:50 판 (→‎생애)
후나사카 히로시
舩坂 弘
별명 살아있는 영령, 불사신 분대장
출생지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도치기 현 니시카타 정
복무 일본 제국 육군
복무기간 1941년 ~ 1945년
최종계급 군조(중사)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후나사카 히로시(틀:Ja-y, 1920년 10월 30일 ~ 2006년 2월 11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이자, 사회운동가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이룩한 뛰어난 전공들과 전후에 일본의 전쟁 범죄를 고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초기 생애

일본도치기 현에서 태어난 후나사카는 어릴 적부터 고향에서 싸움꾼으로 유명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집안일을 거들고 가업을 이을 것을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1939년만몽학원 전문부에 입학한 후나사카는 1941년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였고, 우츠노미야 제36부대로 배치되었다가 다시 만주국치치하얼 시에 주둔 중이던 치치하얼 제219 부대로 전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치치하얼 시에서 복무 중이던 후나사카 히로시는 당시 소련 육군과 벌였던 교전에서 소련군의 분대 하나를 가타나 하나로 괴멸시킨 일로 인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태평양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1944년팔라우앙가우르 섬으로 전출된 후나사카 히로시는 앙가우르 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앙가우르 섬에 상륙해오는 미군을 척탄통과 화포를 이용해 200명 가량이나 사살하면서 버텼고, 그런 다음에는 남은 아군 잔병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다. 도중에 대퇴부에 열상을 입었으나, 그 상태로 인근의 자연 동굴 안에 임시로 마련한 은신처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앙가우르 섬 전투 도중에 후나사카 히로시는 몇 번이나 중상을 입었지만, 그때마다 미군 병사 몇 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대장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그의 전공에 대해 놀라워 하기도 했다. 전투 도중에 미군 기지에 홀로 잠입하여 미군의 간부들을 수류탄으로 사살하려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곧바로 포로 수용소에 갇혔으나, 이내 다시 탈출하고는 같은 부대에 다시 잠입해 부대의 탄약고를 폭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나사카 히로시는 민간인이나 포로를 죽이는 행위를 매우 경멸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난징 대학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부하가 붙잡은 미군 포로를 처형하려 하자 이를 아이키도를 이용해 제지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강시 미군 포로였던 포레스트 버논 크렌쇼 상병이 감사히 여겼다.

전후

1945년제2차 세계 대전일본 제국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의 패배로 끝나자, 포로 생활을 거쳐 1946년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팔라우일본 간의 화해를 촉구하는 운동을 벌이는 한편, 자신이 전투를 수행했던 팔라우앙가우르 주에 전사한 미군과 일본군을 추모하는 위령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와도 친분을 맺었으나, 그가 파시스트로 전향하자 이를 한심하게 여겨 그와 의절해 버렸다. 한편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전쟁 중에 목격했던 위안소들의 위치를 조사하여, 이를 언론에 제보하기도 했다. 2006년일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