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월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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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프랑스의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프랑스의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의 공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야기시킨 바 있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등귀는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의 도산에 의한 실업 증대 등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24일 왕이 퇴위하였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의 공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야기시킨 바 있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등귀는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의 도산에 의한 실업 증대 등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고, 24일 왕이 퇴위하였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결국 당선되었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결국 당선되어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의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벽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1848년 독일 혁명|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을 회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의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벽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1848년 독일 혁명|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을 회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

2017년 5월 30일 (화) 02:30 판

프랑스 2월 혁명은 1848년 2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일어난 의회 내 반대파가 한 운동이고 루이 필리프7월 왕정이 해산하고 공화정이 성립하였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프랑스의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의 공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야기시킨 바 있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등귀는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의 도산에 의한 실업 증대 등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고, 24일 왕이 퇴위하였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결국 당선되어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의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벽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을 회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