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틴 숲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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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폴란드인들.
학살 이후 암매장지.

카틴 숲의 대학살(폴란드어: zbrodnia katyńska, 러시아어: 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은 소비에트 연방 스몰렌스크 근처 그네즈도보(Gnezdovo) 마을 부근의 숲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2만 2천명에서 2만 5천여 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다. 카틴(Katyń) 숲은 이 사건이 있었던 장소에서 가까운 마을의 이름으로 당시 나치 독일이 대내외 선전용으로 붙인 이름이다.

사건의 발단[편집]

1939년 9월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의 양쪽에서 침공을 당한 폴란드는 패배하여 많은 폴란드인이 전쟁포로가 됐다. 1940년 4월 13일 독일 국방군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근교에 있는 카틴 근처의 숲에서 총살된 뒤 집단매장된 4,100여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나치 독일은 조사를 시작해 총 22,000명 이상의 폴란드군 장교, 경찰관, 공무원, 지역유지 등의 매장된 유체를 발굴했다. 소련은 1941년 가을에 자행된 독일군의 만행이라고 우겼으나, 독일측의 조사로 소련측이 행한 대량 학살임이 입증됐다. 독일 측은 소련이 그들을 재판 없이 대량학살했다며 선전했다. 연합국 측에서는 암호 해독의 거점이었던 블레츨리 파크에서 추축국의 무선통신을 해독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커다란 묘의 구멍과 그것을 발견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44년 구 소련은 카틴 숲을 재조사하여 시체를 다시 발굴했다. 같은 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카틴 숲 사건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지 알 대위를 밀사로서 발칸 반도로 보냈다. 알은 추축국 측의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접촉해 이 사건을 소비에트 연방이 진행했다고 결론지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나치 독일이 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굳게 확신하여 이 결론을 거부했다. 알은 자신의 조사를 공표할 수 있게 허가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를 금지했으며 알의 보고를 기밀에 붙였다. 이후 알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사모아에서 보냈다.

냉전 시기의 논쟁[편집]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 공산당의 간부들은 이 사건에 대해 독일이 자행한 것이라면서 소련의 압력을 고려해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 이는 1989년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소련의 검찰관은 카틴 숲 대학살에 대해서 독일을 고발했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전쟁범죄 중 하나가 독일의 파시스트에 의해 폴란드인 포로가 대량 학살된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카틴 숲의 학살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1952년 미국 의회에서는 카틴 숲 사건이 1939년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계획되어 실행되었다고 인정하였다. 1970년대 후반 영국은 희생자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당시 냉전 중 소련 정부를 자극한다고 하여 비난받았다.

진실 공개[편집]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학자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학살을 명령하고, 당시 내무인민위원장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명령서에 서명한 것을 밝혀냈다.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매장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이는 메드노에(Mednoe)와 퍄치하키(Pyatikhatki)를 합해,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인을 살해한 것을 인정했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러시아 정부는 최고기밀문서의 제 1호을 공개했다. 그 중에는 서쪽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현지인 및 각 야영지에 있는 폴란드인 25,700명을 사살하라는 스탈린 및 베리야 등 소련 중요 권력자의 서명이 들어있는 계획서 및 소련 정치국이 제출한 1940년 3월 5일 사살 명령문과 21,857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실행되었고 피해자의 개인 자료를 폐기하였다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폴란드의 외교 마찰[편집]

  • 러시아는 이 사건에 소련군이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국가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러시아 군법원은 2005년 1월 11일에 이 사건이 유엔이 규정한 집단 학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 폴란드 국가 기념연구소(IPN)의 레온 키에레스 소장은 러시아 군법원의 결정에 "놀랄 일도 아니며 러시아는 해당 범죄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비난한다.
  • 러시아 당국은 카틴 사건 관련 문건 183건 가운데 67건만을 폴란드 정부에 제공하겠다고 밝혔을 뿐, 116건은 기밀을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영화화[편집]

2007년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에 의하여, 이 사건을 제재로 한 영화 《카틴》이 제작됐다. 바이다의 부친도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

폴란드 대통령기 추락사고[편집]

2010년 4월 10일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카틴 숲 대학살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하려다가 사망했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