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 성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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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淸風) 성열현(省熱縣)은 고구려 사열이현(沙熱伊縣)의 전조에 백제고읍(古邑)이다.


성열현의 원전사료[편집]


청풍 성열현의 학설[편집]


청풍 성열현의 정립[편집]


일본인 말송보화의 학설[편집]


일본인 전중준명의 학설[편집]


일본인 말송보화와 전중준명의 학설의 무비판적 수용의 문제[편집]

  • 일본인 학설을 한국 학계에서 정설로 수용(1)→ 일본인이 제기한 성열현(省熱縣)은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의 고명으로서 그 치소는 신반리. 본서 악지의 성열현(省熱縣) 및 본서 권41 열전 김유신 열전 상(金庾信傳上)의 성열성(省熱城)은, 본서 권34 지리지 강주(康州) 강양군(江陽郡) 의상현(宜桑縣)의 옛 지명인 신이현(辛爾縣)과 같은 곳이다.[10]
  • 일본인 학설을 한국 학계에서 정설로 수용(2)→ 《일본서기》권19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조, 동(同) 5년(544) 11월조 및 23년(562) 정월조에는 이 지역이 후기 가야연맹의 한 세력으로서 사이기국(斯二岐國)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러므로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라는 표현이 가야의 것이라면 이는 연맹 소속국을 하나의 현(縣)으로 취급하려는 대가야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표현이 신라쪽의 것이라면 이는 후기 가야의 한 독립 소국을 후대의 신라에 의해 지방 편제된 성열현(省熱縣·辛爾縣)으로만 취급하려는 신라 계통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11]
  • 일본인 학설을 한국 학계에서 정설로 수용(3)→ 우륵(于勒) 6세기 중엽 당시 후기 가야연맹의 한 소속국인 사이기국(斯二岐國 의령군 부림면)의 사람. 가야의 악사(樂師). 가야금의 대가(大家).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 3월조와 13년(552)조 및 본서 악지의 해당 기사들을 종합해 볼 때, 우륵은 대가야의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가야 지역의 음악들을 모아 가야금곡 12곡으로 정리하였으며, 551년에 낭성(娘城)에 순수(巡守)해 온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여 국원(忠州市)에 안치되었고, 거기서 계고(階古) 등에게 가야의 음악을 전수시켰다.[12]


임나일본부의 실체[편집]

  •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대일본사(大日本史)》(1933)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남선경영론을 완성시킨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이다.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로, 《삼국지》위서 왜인전에 3세기 중엽에 왜인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라를 점유, 왜왕삼한에 통제력을 미쳤다.
  • §둘째로, 《일본서기》진쿠황후(神功皇后) 49년조의 7국 및 4읍 평정기사, 369년 당시 는 지금의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 전라남북도충청남도 일부를 귀복시켜 임나 지배체제를 성립[13],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받았다.
  • §셋째로, 광개토왕비문의 기사, 왜는 400년 전후해서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하여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강화하였다.
  • §넷째로, 《송서(宋書)》왜국전에 왜 5왕의 작호,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 하여금 인정시키고자 하였다.
  • §다섯째로, 《남제서(南齊書)》가라국전 및 《일본서기》게이타이왕(繼體王) 때의 기사, 일본은 5세기 후반에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완화, 6세기 초반에는 백제에게 전라남북도 일대의 임나땅을 할양하여 주고,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 등을 약탈당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 §여섯째로, 《일본서기》긴메이왕(欽明王) 때의 기사, 540년대 이후 백제임나일본부설임나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결국 562년에 신라임나 관가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 §일곱째로, 그 뒤에도 일본임나 고지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신라에게 임나의 조(調)를 요구하여 받아내었다. 즉, 임나일본부설은 왜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하여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야·백제·신라 등의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주근거 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책으로서, 원사료 편찬과정에 상당한 조작,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광개토왕비문이나 《송서》왜국전의 문헌기록은 과장되게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문헌사료상의 문제점을 차치하고 그 주장의 사실관계만 검토하여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14]


성열현 왜곡의 정립의 당위성[편집]


각주[편집]

  1. 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樂》羅古記云 加耶國 嘉實王 見唐之樂器而造之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豈可一哉乃命樂師 省熱縣 人 于勒 造十二曲
  2.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3. 《청풍 성열현인 악성 우륵의 사료집성》(2013)
  4.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第六集地理集第二卷 疆域考 弁辰別考 성열(省熱) 청풍(淸風)》金富軾樂志云。加耶國嘉實王。見唐之樂器。造加耶琴。乃命樂師省熱 縣人于勒。造十二曲。以象十二月之律。後于勒以其國將亂。攜樂器。投新羅眞 興王。王受之。安置國原。今忠州乃遣大柰麻注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 三人旣傳十二曲。約爲五曲。奏之王前。王聞之大悅。諫臣獻議。加耶亡 國之音。不足取也。王曰。加耶王淫亂自滅。樂何罪乎。遂行之。以爲大樂。 加耶琴有二調。一河臨調。二嫩竹調。共一百八十五曲。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 都。二曰上加羅都。三曰寶伎。四曰達己。五曰思勿。六曰勿慧。七曰下奇物。八曰師子伎。九曰居烈。十曰沙八兮。十一曰爾赦。十二曰上奇物。 〇本紀云。眞興王十二年。梁簡文帝時。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 文知音樂。特召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〇鏞案 省熱者。沙熱也。沙與省聲近。沙熱者。今淸風也。于勒游於淸風、忠州之間。故 忠州有彈琴臺、在州南五里。四休亭、在州西二十里荷潭之上。皆于勒之所嘗游也。 [1][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申采浩, 註譯者 李萬烈,《註釋 朝鮮上古史》, 螢雪出版社, 1994, p. 133
  6. 동아일보 1934년 12월 16일자 내 자랑과 내 보배 가야금[2]
  7. 奈隄郡은 奈堤郡의 오자로써 정정하다.
  8. 末松保和《任那興亡史》, 길천홍문관, 소화 36년(1961), pp. 240~41. 3판, 于勒を以て省熱縣の人といつてゐるが, それは于勒の出生地を示すよりも, 加羅の樂の起るところを示すものとして, 一考に値ひするであらう. 省熱(song-ior) 縣は, その文字からいへば地理志の朔州奈隄郡の沙熱伊縣が一番近いが, 樂志の省熱は恐らく地理志の康州江陽郡 (大良·大耶) の屬縣の一なる辛爾(sin-i) 縣に當ると思ふ. 卽ち日本書紀の斯二岐國である. この比定の誤たざるべきは.
  9. 田中俊明, 《大加耶聯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平成 5年(1993), p. 62, 64. [于勒の出身地] そこで, (イ)に示した出身地の「省熱縣」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縣」字は, 「唐の樂器」とどうように, 新羅人がつけ加えたものであろう. いずれにしても, ほんらいのかたちとみる必要はない. 『三國史記』の地理志には「省熱」 はみえていないが, 金庾信傳には「省熱城」がみえている. 善德王一三年(六四四) 秋九月, 王は金庾信を上將軍として, 兵を率いて百濟の加兮城·省熱城·同火城などの七城を伐たせた. 大勝利をえて, 加兮の津を開いた. 「省熱縣」は, この「省熱城」とおなじとみてまずまちがいないでぁろう. この記事は, 百濟が新羅西邊の舊加耶地域に進出し, とくに六四二年, 大耶城(いまの陜川) をはじめ四十余城を奪取したのに對し, 新羅が金庾信を派遣して挽回をはかるもので, 洛東江をめぐる攻防を記したものである. 加兮城は, 地理志の康州高靈郡新復縣の古名「加尸兮縣」に, 同火城は, おなじく星山郡壽同縣の古名「斯同火縣」にあてて問題ない. それぞれ現在の高靈郡牛谷面·龜尾市(舊漆谷郡仁洞面) にあたる. さて問題の「省熱城」であるが, 康州江陽郡宜桑縣の古名「辛爾縣」にあてる意見(末松保和『任那興亡史』)と, 良州獐山郡解顔縣の古名「雉省火縣」 にあてる意見(金榮來『百濟南方境域の變遷』)がある. 前說では, 現在の宜寧郡富林面にあたり, 後說では, 大邱市東區(舊解顔面)にあたる. わたしは, 前說が妥當であると思う. 後說であれば, 洛東江をおおきく越えて, 新羅が大耶州からしりぞいてたてなおしをはかるべく設置した大押梁州(いまの慶山)の目前まで, 百濟がうばいとつていたことになる. それよりは, 洛東江が攻防の最前線であり, 新羅の奪回の突破口が, さきの三城(をふくむ七城) であつた, とみるほうがむりがないように思える. 以上のように,「省熱縣」を康州江陽郡の領縣宜桑縣の古名「辛爾縣」とみて, 現在の宜寧郡富林面にあたると考えるのであるが, それは,『日本書紀』にみえる「斯二岐國」にあたる. 『日本書紀』では, 欽明二年(五四一) 四月條と 同五年(五四四) 二月條の, いわゆる「任那復興會議」に參席した國のひとつとしみえ, さらに同二三年(五六二) 正月條の, いわゆる「任那」滅亡記事の分註にもみえる. つまり, もつともおそく滅んだ加耶諸國のひとつである. 于勒の出身地である 「省熱縣」という新羅的な表記は, この「斯二岐國」を指すものである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
  10. 盧重國 外 3,《譯註 三國史記》4 -주석편(하)-, 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1.
  11. 盧重國 外 3,《譯註 三國史記》4 -주석편(하)-, 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1.
  12. 盧重國 外 3,《譯註 三國史記》4 -주석편(하)-, 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1.
  13. 매일경제 2013년 1월 10일자 한반도 지배 주장 日, ‘무덤’ 때문에 거짓 들통[3]
  14. 金泰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8
  15. 일본서기(日本書紀) 卷第19》에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이다.
  16. 《청풍 성열현인 악성 우륵의 사료집성》(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