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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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출생 1947년 3월 26일(1947-03-26)
미국 미 군정 조선 경상북도 대구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직업 변호사

조영래(趙英來, 1947년 3월 26일 ~ 1990년 12월 12일)는 대한민국의 인권 변호사였다.

어린시절[편집]

1947년 대구에서 부 조민제와 모 이남필의 일곱 자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부유함과 가난을 모두 경험하였다. 아버지는 독학으로 자수성가, ㈜대동유지화학공업 설립, 조영래가 7살될 때까지 누구보다 풍족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후 경제적 어려움 겪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러한 자신의 환경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존감 강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로 이주하였고 서울 수송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운동[편집]

경기 중학교 및 고등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영자신문반, 룸비니 불교학생회, 영어 바이블스터디, 농촌활동반, 웅변반, 학예부 부장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중학교 2학년때 집 주변에 있던 개운사 암자 스님을 만나 불교 경전과 가르침을 접하였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동기생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경기 중에 재학중이던 동생과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공납금 미납자 명단을 보고 그러한 명단 공개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동생이 그 게시를 보고 마음 아파할 것을 우려, 게시문을 뜯어버렸고 이 사건으로 인해 정학처분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에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림, 노래 등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그림을 즐겨 잘 그렸으며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법학과를 입학하였으나 정작 본인은 수석입학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시위, 6.7 부정선거 항의, 유신헌법, 삼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를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재학 중 법학 공부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고 오히려 경제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대학시절 학교 학과 공부보다 혼자 인문 사회 다양한 분야의 동서양 고전을 탐독했다.

민주화운동[편집]

1969년 대학 졸업후 대학원을 진학하여 민법을 전공하였다. 이 시기부터 공익, 시민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공해 소송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1970년 사법시험 준비 중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전태일 정신을 알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사법시험 준비 중 당시 학생운동울 탄압하기 위해 조작된, 소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하였다. 복역 후 1974년 만기 출소하였다. 1974년 4월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6년동안 피신 생활을 하였으나 피신 중에도 다양한 민주화운동에 관여했다. 또한 공해관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3년동안의 준비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였다.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사형선고 받은 김지하 시인을 구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심선언> 집필에 관여하였다. 김지하 시인과 조영래의 공동 작업의 결과로 <양심선언>이 국내외에 발표되었다.

변호사 조영래 : 변론[편집]

1980년 5월 수배가 해제되고 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재임되었다. 1982년 2월 사법연수원 수료 후 1983년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및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다. 1984년 한국 사법사상 초유의 대규모 공익 집단 소송인 '망원동 수해 사건' 소송을 담당하였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군사독재 치하 국내 최초의 <인권보고서>(대한변협 간행) 집필을 하였다. 같은 해 인권변호사들의 상설조직인 정법회의 창립 및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탄생에 참여 하였다. 1987년 '보도지침 변론', '상봉동 진폐증 사건', 기타 노동, 빈민, 공해 문제 관련 다양한 공익 소송을 담당했다. 변론활동 중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꾀하였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경우 변호인의 고발장, 법정 안과 밖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여론 조성을 주도하였다. 언론사 보도지침 사건에 대해서는 검사 공소장에 대한 석명권을 요구하였다. 망원동 수해사건의 경우 증거보전 신청, 집단 소송을 위한 선도 소송, 재판 진행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였고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소송에서는 소송의 사회적 의미와 변론 진행에 관한 의견서 제출을 하였다. 상봉동 진폐증 사건에서는 소송 구조제도를 활용함으로서 새로운 변론 방식을 시도하였다. [1]

1987년에는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당시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 문화방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한겨레신문, 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집필하였다.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동남아(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러시아, 유럽, 미국 등지를 여행하였는데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90년 1월에서 5월까지 미국 컬럼비아대 인권문제연구소 국제세미나 초청으로 5개월간 체류하였다. 1990년 9월 폐암 진단을 받았고 3개월 투병생활 후 12월 12일 영면하였다.

1992년 출간된 <변론선집>에는 그가 변론했던 공익 소송의 실제 변론기록을 통해 인권 변호사로서의 발자취가 담겨있다. (<변론선집>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 1부 망원동 수재사건, 제2부 부천서 성고문사건; 1. 성고문 고발사건, 2. 권인숙 형사사건, 3. 권인숙 위자료 청구사건, 제3부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 제4부 상봉동 진폐증 사건, 제5부 노동사건; 1. 대우어패럴 사건, 2. 장미숙 사건, 제6부 시국형사사건; 1. 나준, 나미영 사건, 2. 한겨레 신문 압수 수색 취소청구사건, 3. 「이론과 실천사」, 「한울출판사」 사건, 4. 「보도지침」사건, 제7부 일반사건; 1. 위조어음 청구사건, 2. 공갈사건)

어록[편집]

조영래는 그가 남긴 글과 어록을 통해 세속적인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합리성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는 기존의 것을 일단 고집하는 보수성, 일정한 관념의 틀에 지배받는 도식적인 사고방식이 없었다. 사람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복잡 다기한 측면을 한 점의 아집이나 집착없이 보려했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교조적 맹목주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그의 노력에는 종교적인 엄숙함마저 서려있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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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에 이은 민주화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그리고 탁월한 인권변호사로서 20년여를 활동해오는 동안 그는 특히 빼어난 문장력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이래 쓴 글들은 민주화 운동 관련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들도 적지 않다. 그가 투철한 역사의식과 깊고 정확한 통찰력을 가진 민주화운동가로서 주로 5공에서 6공에 이르는 역사적 격량기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역사의 굴절과 왜곡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으며 그가 굳게 믿고 있는 민주화의 소신이 어떠한 것인가를 되새겨보는 것은 현재나 장래에 이 나라의 정치사가 어떻게 제 길을 찾고 바로 잡혀져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에는 조영래가 5공 청산, 검찰독립, 노동권, 민주주의, 민주화, 사법개혁, 개방개혁, 인권, 정치 민주화, 표현의 자유에 관해 일간지·월간지 등에 발표된 글들과 중요 사건의 변론문, 몇 편 안 되는 일기,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독자들로서는 다소 뜻밖일 두 편의 시로 이루어져있다. 그밖에 조영래에 관한 글과 추모의 글들이 담겨있다. [3]

저서[편집]

관련 도서[편집]

출신학교[편집]

참조[편집]

  1.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도서출판 까치
  2.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김기선/ http://www.kdeo.or.kr/blog/people/post/624
  3.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