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의 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육진의 난(六鎭之亂)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말기 523년에 발생한 반란을 말한다. 6진은 북위의 북쪽 국경지대에 설치된 여섯 기지인 회삭진(懷朔鎭) · 무천진(武川鎭) · 무명진(撫冥鎭) · 유현진(柔玄鎭) · 옥야진(沃野鎭) · 회황진(懷荒鎭)을 말한다.

역사[편집]

북위는 처음엔 자신들과 같은 북방의 이민족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 평성의 가까운 거리에 생명선을 긋고 북쪽의 수비를 중요시하며 요새를 쌓았다. 처음엔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유력 호족을 선택해 6진을 대표하는 북쪽을 경비하는 영민으로 이주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연히 영민들은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의해 수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이때부터 북쪽의 영민은 서서히 냉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본래 명족출신이었던 그들을 [부호](府戶)라는 출세를 더이상 바라볼 수 없게 차단되는 호에 편제하고, 중앙으로부터 서임된 장관인 도대장(都大將)에게 착취당하는 몸이 되자 일거에 불평불만이 증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축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은 523년 옥야진 백성의 거병이었다. 파륙한발릉(破六韓抜陵)이 수령(首領)인 반란병들은 수비대장을 살해하였고, 이들의 움직임에 홀려 기타 여러 진들에도 전염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반란자체는 530년 장군 이주영이 진압했으나, 그 후 북위에 대한 양 (남조)나라 군대의 침공이 있었고, 또한 국내는 정권을 장악한 이주씨 일파의 전횡이 일어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6진의 유력자 중에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 군벌, 일명 관롱집단으로 불리며 서위부터 북주, , 당나라까지 이르는 변천과정에서 각 왕조의 핵심적인 권력집단으로 군림하였다. 북주의 우문태, 수나라의 양견, 당나라의 이연등은 각 왕조의 창시자이며 무천진의 유력자 일족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