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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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현(儒城縣)은 오늘날에 대전광역시 유성구 일대에 있던 옛 행정구획으로,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삼국시대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縣)을 계승해 설치하였고, 조선 초에 폐지되었다.
이름
[편집]원래 이름은 노사지(奴斯只) 또는 노질지(奴叱只縣)이다. 유성(儒城)은 이를 한화(漢化)한 것으로 결국 표기법만 달리하여 같은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노사(奴斯)에서 노(奴)의 음은 "노~누", 사(斯)는 질(叱)처럼 받침자인 "ㅅ"로[1] 읽혔으므로, 따라서 노사(奴斯)는 "눗~늦"의 음차(音借)이다. 유성(儒城)의 유(儒) 역시 고대에 노(奴)자와 유사하게 노, 누 등으로 읽혔다. 한편 지(只)의 고대음은 "기"인데 백제어로 재(城)를 의미하는 '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노사(奴斯) 부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현대에 전해지지 않으며, 이후 개명된 유성(儒城)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선비·학자의 고장으로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어 실상에 맞아 주민들의 인식이 이제는 거의 그렇게 굳어졌다.
역사
[편집]- 구즉동에서 구석기 유적. 구성동과 갑천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 서기 9년에 마한의 영역 대부분이 백제에 합병되면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로도 한동안 백제가 대외적으로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체제를 계승하여 백제의 지배하에서 소국체제가 계속되었다.
- 백제의 행정체제가 정비되면서 노사지현(奴斯只縣) 또는 노질지현(奴叱只縣)이 되었다.
- 고려 초에 비풍군을 회덕현(懷德縣)으로 개칭하고 현종 9년(1018년)에 공주목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이때 유성현도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년)에 지방관인 감무를 두었으나 유성은 공주의 속현으로 남았다.
- 1973년 대통령령 제6543호로 유성면을 유성읍으로 승격했다.
-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1. 10)로 유성읍 일원이 대전시 중구 관할로 신설된 유성출장소에 편입되었다.
- 1984년 9월 1일 시 조례 제1404호(1984. 9. 1 공포)로 중구 유성출장소를 시 직할 유성출장소로 승격시켰다.
-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12367호(1987. 12. 31 공포)로 서구가 신설됨에 따라 유성출장소의 행정구역 구 명칭이 중구에서 서구로 변경되었다.
- 1989년 1월 1일 법률 제 4049호(1988. 12. 31 공포)로 대전이 직할시로 되면서 유성구가 신설되었다.
각주
[편집]- ↑ 叱자가 대개 향찰, 도는 이두에서 ㅅ, ㅈ의 받침자로 자주 사용되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